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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공 May 04. 2022

백패킹에 없으면 큰 일 나는 물건

백패킹 장비를 마련하는 일

그와 나는 소파에 앉아 백패킹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다. 압도하는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가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오는 여행. "이거다!" 우리는 일시에 백패킹을 꿈꾸게 되었다. 그런데 백패킹이라는 것이 참 준비할 것이 많더라. 일단 배낭부터 큼직한 거로 하나 마련할 필요가 있고, 침낭, 매트, 텐트가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며, 그 외 랜턴, 의자, 테이블, 요리 도구, 컵, 보온병, 등산스틱 등 부수적인 물품은 한도 끝도 없더라.


물건을 사는 것이 즐거운 사람도 있고, 괴로운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해당한다. 정말로 입을 옷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사러 가도 행거에 주르륵 걸린 옷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쇼핑을 하는 것이 힘들다. 하나하나 살펴보고 어울리는지, 또는 나한테 맞는지 확인하고, 여러 물건들 중 후보를 추리고, 그중 진짜 구매할 상품을 결정하는 일이 나에게는 숙제같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가 결정을 어려워하는 소위 결정장애는 아니다. 나는 자꾸만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때문에 결정이 어렵다기보다 정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고 확신을 얻으려 하니 쇼핑이 어려운 것이다.


백패킹을 시작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쇼핑으로부터 출발한다. 역시나 나는 검색하고 물어보고 정답을 찾아 헤매었다. 장비를 하나하나 알아보던 중 'BPL'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백패킹 라이트(Backpacking Light)의 줄임말로 경량으로 백패킹 짐을 추리는 것을 일컫는다. 물건 욕심이 없는 나에게 이 개념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까짓 거 매트, 침낭, 텐트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했다. 정말 필수적인 물품들만 구비해서 간소하게 짐을 싸겠다고 다짐했다. 더군다나 여행마다 체력이 한계에 부닥칠 때까지 걷고 또 걷는 우리에게 안성맞춤인 것으로 보였다. 나의 숨겨진 물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단 가방부터 샀다. 백패커니까 최소한 가방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배낭을 배송받은 날은 몇 번을 등에 짊어졌다 풀었다 반복했다. 백패커들이 자기 키의 절반만 한 가방을 짊어지고 가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등을 다 덮어버리는 큰 가방을 멘 사람을 봤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게 큰 가방을 멘 사람은 그 사람뿐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곤 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가방을 내려두고 그 옆에 퍼질러 앉아 잠시 휴식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여행을 진짜 즐길 줄 아는 사람 같고, 험난한 여행을 헤쳐나갈 것 같아 보이더라. 백패킹이 뭔지도 모를 때인데도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다. 나도 이제 배낭이 생겼다.


그다음은 매트와 침낭. 그 뒤로 텐트와 나머지 소품을 샀다. 텐트는 캠핑 카페에서 중고로 구매하였는데, 직접 주차장에 텐트를 피칭하시면서 사용법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몇 가지 물품들도 중고로 샀다. 대체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판매를 하고 있어 물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어느 정도 물품이 마련되었을 때는 어디 나갈 일이 없는데도 가방을 쌌다 풀었다 반복했다. 그냥 가방을 한 번 싸 보고 싶더라. 묵직한 가방을 등에 메보고 거울에 비쳐도 봤다. '진짜' 백패커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콧노래가 나왔다. 이젠 정말 준비가 다 되어 나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사야 할 품목은 도무지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초기에 BPL을 지향하겠다던 나의 생각은 무너졌다. 다른 백퍼커들의 노하우나 새로운 물품들을 볼 때마다 그게 없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이 들었다. '비가 많이 오면 타프까지 쳐야 비가 새지 않는 다는데 사야하나', '팩 다운이 되지 않는 땅에서는 스트레치 코드가 필수라는데 끈이랑 고리를 사서 만들어야겠다.', '백패킹용 버너는 냄비가 중간만 탄다는데 버너 패드도 사야겠다', '캠핑하는 사람들은 이소가스를 쟁여두는구나 나도 주문해야지', '산에 가면 추울 텐데 부피가 작고 보온이 잘 되는 겉 옷 한 벌 있어야겠는데', '백패킹 때는 샤워를 못하니까 샤워 물티슈를 미리 사둬야겠다.' 캠핑 카페나 블로그 글을 들여다볼수록 준비할 품목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래 가지고는 나갈 수 있을까 싶었다. 준비를 해도 해도 준비가 안 된 느낌이었다. 더 준비해야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준비인지는 몰라도 하여간 준비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빠졌다. 끊임없이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쯤에 그가 저렴한 항공권이 나왔다며 제주도행 티켓을 끊었다. 그때서야 나는 백패킹 공부를 멈출 수 있었다. 역시 물은 엎질러 버려야 하더라.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까지 준비한 장비들을 가방에 욱여넣고 제주도로 당장 떠나게 되었다.


4박 5일의 제주도 백패킹 여행을 다녀와서 깨달았다. 백패킹에 없으면 큰일 나는 물건은 없다는 것을. 없으면 불편한 것은 있어도 큰 일 날 일은 없더라. 그러니까 그놈에 '큰 일' 따위는 무서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초경량으로 짐을 꾸리는 백패커 중에는 텐트도 안 쓰는 사람도 있다. 매트에 침낭을 싸매고 야외에서 취침하는 것이다. 하물며 나는 기본적인 장비인 침낭, 매트, 텐트는 다 갖추지 않았나. 뭐가 그리 겁이 났던 것일까.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한 발만 디뎌보면 둘째, 셋째 걸음은 알아서 디뎌지더라. 머뭇거리는 모든 이들이여 백패킹의 세계로 한 발을 내딛자. 그러면 관성이 그대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할지니 걱정일랑 접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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