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는다고 반짝이지 않는 법은 없으니까
아침에 맨발 걷기를 하고 들어가 보니,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봄은 확실한 온기를 내어 주지 않는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따뜻한 잔치국수에 열무김치를 먹거나 장칼국수에 갓김치를 먹으면 정말 맛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엔 벌써 국수와 김치를 먹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오늘의 점심은 낫또, 사과와 당근 그리고 브로콜리를 갈아 끓인 주스와 고구마였다. 급식을 끊은 지 다음 주면 한 달이 되어간다. 다행히 급식을 끊고 몸무게는 방학 전으로 돌아갔다. 지난달 지나친 손가락 부기로 병원에 방문한 이후, 동물성 지방뿐만 아니라 밀가루도 끊고 되도록이면 염증을 덜 일으키는 식단으로 바꿨다. 집에서 청국장을 자주 끓여 먹지만, 때로는 그 맛에 지치기도 한다. 그래서 당분간 된장국을 먹고 있다.
아침엔 딸이 좋아하는 마파두부를 해 주었다. 호박과 브로콜리, 양파, 두부를 넣고 만든 마파두부를 딸은 맛있다고 했다. 저녁엔 딸이 제육볶음이 먹고 싶다고 해서, 딸은 김치와 팽이버섯을 넣은 제육볶음을 해주고 난 된장국과 텃밭에 자란 쌈채소를 싸서 먹었다.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엔 평소에 먹지 않는 라면도 한 그릇 끓여서 먹고 싶다. 어린 시절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와 언니, 오빠와 끓여 먹던 라면이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처음 컵라면을 학교에 가져갔던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설렘이 아직도 내 맘 속에 남아 있다. 심지어 고3 때 독서실 책상 위 서랍엔 맵고 자그마한 컵라면이 채워져 있으면, 늦은 밤 공부하는 것도 나름 낭만적으로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맛있는 것들이 몸에도 이롭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아이들이 먹는 과자 또한 마찬가지다. 맛있으면서도 몸에도 이로운 음식들을 만드는 움직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도 내어 놓아야 한다는 위험한 거래가 없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수없이 맛있고, 따끈한 국물 요리들이 스쳐갔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생각일 뿐이라고 나를 다독였다. 막상 그런 간절함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내 입과 몸이 원하는 간절함과는 거리가 있다. 나에게 스치는 생각들이 결코 음식을 먹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행복하면, 소화에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스쳐가는 생각들을 내가 온전히 원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더 큰 어려움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름대로 절제하는 식습관은 먹은 후에 나를 더 신뢰할 수 있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다음 주면 잠복결핵 검사를 받으러 간다. 지난달 검사에서 선생님이 다른 약물인 생물학적 제제를 고려해 보자고 하셨는데, 그 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잠복 결핵 검사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물론 작년에 학교에서 잠복 결핵 검사를 했지만, 6개월 이전의 검사 결과여야 한다고 하셨다. 사실 생물학적 제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분명히 업그레이드된 약물이라고 하셨다. 한 달 동안 생물학적 제제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류마티스 이웃님들에게도 의견을 들어봤을 때, 지나치게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복용하는 약들이 안전하다고 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우리는 익숙함을 진리로 착각하니 말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되더라도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필리파 페리
아침 8시 20분에 버스를 타면, 학교 앞에 8시 44분쯤 도착한다. 출근 시간은 8시 50분, 운동장을 두 바퀴 돌다 보면 50분이 된다. 한 바퀴 도는데 3분이 걸린다. 우리 학교 운동장은 흙으로 되어 있고, 주변에 온통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아침 햇살이 비출 때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개구리울음소리도 들리고 폭신 거리는 흙이 쿠션감이 좋게 느껴져 걷기에 더 편하다.
오늘 아침 다른 학교로 겸임 수업을 가시는 강 선생님은 운동장을 걷는 나를 걱정하시면서, 다리 관절을 아끼라고 하셨다. 더욱이 나와 같이 류마티스로 고생하시는 강 선생님은 스테로이드 복용의 부작용을 가끔 말씀해 주시는데, 염증을 조절해 주는 고마운 듯 보이는 이 스테로이드가 얼마나 무서운 약인지 실감하게 된다.
지난달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가운데 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 중간마디 관절 염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프기 전의 손가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주사를 맞지 못한 두 번째 손가락은 여전히 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 중이다. 그래도 지난 진료 이후보다 아침에 더 편해졌고, 아침 식사 후 스테로이드를 먹으면 한층 더 가벼워진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어제보다는 더 붓고 뻣뻣하다. 턱관절은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아침에는 가끔 뻑뻑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오른쪽 다리오금은 지난번처럼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나거나 오래 걸으면 조금 불편한 증세가 남아 있다.
한 달 전, 통증의 정도를 6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3.5 정도 될 것 같다. 이것이 스테로이드의 효과일 것이고, 체중과 조금 더 엄격해진 식단 관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염증은 식단 관리와 체중 관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요즘 봉침을 맞으러 가지 않았다. 지난 진료 때 손가락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손가락이 가라앉았기 때문이고, '주사를 맞지 않은 손가락에 봉침을 맞아 볼까?' 고민도 했지만, 주사를 맞으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만류에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수없이 맞았던 봉침이 당시에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1년 맞으면서 그 효과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둘째 언니는 나에게 달맞이꽃 종자유와 뉴질랜드 초록 홍합을 원료로 한 약을 먹어 보도록 권했다. 류마티스에 좋은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걱정하는 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구입해서 먹고 있다. 대신 다른 보조식품들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지 않고, 조절하고 있다.
한 달 후면, 류마티스를 진단받은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지난가을 노란 은행잎들을 떠나보낸 은행나무는 아주 조그맣고 귀여운 초록잎을 세상을 향해 다시 내밀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나의 시절도 이렇게 흘러간다.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수없이 마음속으로 되뇐다. 때로는 이유 없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들숨과 날숨의 경계에서 숨을 참는다. 잠시 숨을 참으면, 더 이상의 불안도, 삶에 대한 강박도, 죽음에 대한 거부감도 동시에 멈추는 느낌이 든다.
매일 밤 우리 집 지붕 위로 북두칠성이 지나간다. 일곱 개의 별이 모두 같은 빛으로 반짝이지 않는다. 희미하게 빛나는 별을 다른 여섯 개의 별들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한 후에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북두칠성이라는 것을 믿고 웃어본다. 이상하게 별과 마주하면 삶의 무게를 잊어버린다.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내린 날은, 보이지 않겠지만 난 여전히 우리 집 지붕 위로 북두칠성이 떠오를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날이면, 북두칠성도 잠시 그 연결된 선에서 벗어나 늘 반짝여야 한다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쉬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