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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라책방 Jun 17. 2023

인행사

'사회복지' 보다 '사회복지사'를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음성 꽃동네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그곳의 직원들이 사회복지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자격증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사회복지사가 되려면 학문으로서의 사회복지를 공부해야 했습니다. 막상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 이런 것도 대학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건가 싶은 과목이 있었는데 바로 '인간행동과 사회환경'이었습니다. 보통은 이를 줄여서 '인행사'라고 불렀습니다. 


인행사는 사회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출생부터 죽음까지 오로지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과목입니다. 인간행동과 사회환경의 도입부에서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공부합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 전제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작부터 '이런 걸 꼭 배워야 아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과 성격을 설명하는 이론들을 배웁니다. 프로이트나 피아제, 융, 반두라, 에릭슨, 아들러, 매슬로우, 스키너, 파블로프 등의 학자들을 접하게 됩니다. 요즘은 자기 계발에 관심이 많아 이런 학자들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 하지만 제가 사회복지를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트야 워낙 유명하니 정신분석이라는 낱말이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아들러는 '미움받을 용기'의 그 아들러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 분이죠. 


그중 저는 에릭슨을 공부하면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은 표를 그리면서 달달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어쩜 이렇게 인간을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며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의식의 세계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거나 발달을 위해 특별한 사회 조건을 마련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만 발달 시기에 맞춰 적절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도우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도움의 역할은 부모 또는 주양육자 또는 사회복지 그 누가 되었든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와우! 그럼 시기에 따른 발달 단계를 잠시 살펴볼까요?


1. 인간은 생후 1년 동안 외부 세계에 대한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세상은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기본 전제를 깔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2. 아장아장 걸으면서 자율성을 획득해야 합니다. 작은 성취들이 쌓여 세상을 탐색하는 첫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3. 아동 시기에는 흔히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본인의 뜻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주도성을 가지게 됩니다. 

4. 초등학교 시절에는 또래들과의 활발한 상호작용과 학습에 대한 성취들을 맛보면서 근면성을 얻게 됩니다.

5. 청소년기에는 내가 누구인지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는 시기입니다. 깊은 고민을 통해 본인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6. 초기 성인기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친밀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방법을 시도하고 만들어 가는 단계입니다. 이 시기에는 사회적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7. 중년기에는 사회적으로 왕성한 생산활동을 합니다. 사회적 관계의 다양한 면모를 이해할 수 있으며 각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도 가능해집니다.

8. 노년기에는 자아통합이 제일 큰 과제입니다. 그야말로 삶을 통찰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각 단계별 발달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에릭슨은 사회적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며 자아의 발달을 도모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다음 발달 단계를 잘 수행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희망적이지 않나요? 저는 인행사에서 희망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에릭슨의 이론이 너무 긍정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에릭슨의 이론에 따라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초기 성인기에라도 이런 이론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회적 정체성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습니다. 이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내 인생 자체가 사회복지의 현장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더욱 깊이 새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 전체가 속하지 않은 단계가 없었으니까요. 인간은 누구나 사회 환경에 둘러 싸여 살아가니까요. 


무엇보다 '나'를 내가 만들어 가는 이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수저의 등급에 따라 사회적 성공의 한계를 정하기도 하지요. 에릭슨의 이론에서는 흙수저인지 금수저인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온전히 인식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때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할 수 있는 길도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허용적인 이론인가요! 너의 실패도 성공도 응원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8단계 중에 저는 7단계에 도착해 있으며 앞선 단계 중 빛나는 성과를 낸 단계도 딱히 없습니다. 다만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론을 만났고, '자아'를 두 손에 꼭 쥐고 내 인생을 일궈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내가 흙인지 금인지 보다 나를 둘러싼 환경 안에서 작은 성공들을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흙에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잎을 돋우면서 꽃을 피워 열매를 모든 순간에 홀로인 적은 없었습니다. 흙덩이에서 금덩이 같은 열매를 맺는 그 과정이 마치 우리 인생과 같습니다. 물과 해와 공기가 우리더러 잘 자라라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두 배로 사'라는 제목은 저의 딸아이가 의사, 변호사, 판사가 좋은 직업이라면 회복지는 '사'가 두 번이나 들어가므로 두 배는 더 좋은 직업이라고 하면서 사회복지사 엄마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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