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발음은 유창한데, '사십팔'은 알까?
태어난 지 만 3년, 우리 큰손녀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영어책을 읽고 있다. 기저귀를 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영어책을 보며 조잘거리는 모습이 대견하다. 영어교사인 내 귀에 들려오는 아이의 발음과 억양은 꽤 그럴듯하다. 자세히 들어보면 일부는 책속의 내용과 일치하는 영어가 맞고 일부는 영어처럼 들리지만 손녀가 조작한 영어 소리다.
알파벳도 거의 모르는 아이가 "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해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는 서사를 제법 그럴싸하게 읊는다. 나는 근처에서 안 듣는 척하며 귀를 쫑긋 세운다. 영어 선생 할머니라고 나서서 오류를 수정해 줄 수는 없다. 그랬다간 아이의 흥미만 싹을 잘라버릴 게 분명하니까. 게다가 손녀는 할머니가 영어 선생인지, 그게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저 '맛있는 간식 주는 할머니'면 충분하다.
아이의 영어 실력 뒤에는 엄마 아빠의 지독한 정성이 숨어 있다. 사위가 영어책을 읽어줄 때 보면 연기력이 가히 최강이다. 강조할 단어에선 그림을 탁탁 가리키며 여러 번 발음해 준다. 유치원을 다녀오면 '페파 피그(Peppa Pig)'나 '넘버 블럭스(Number Blocks)' 같은 영상을 딱 30분만 시청하는데, 그때의 아이는 무서울 정도의 초집중 상태다. 할머니가 와도 아는 체도 안 하고, 간식으로 꼬셔봐도 과자만 쏙 채가고 다시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의 움직임과 대사를 매치시키며 통째로 암기해 버리는 아이의 눈동자는 광채를 뿜는다. 가끔 영상에서 들은 대사를 불쑥 내뱉을 때면 그 유창함에 깜짝 놀라곤 한다.
문득 교육학에서 배운 데일(Dale)의 '경험의 원추 이론'을 떠올려본다. 구체적인 직접 경험(행동 단계)을 바탕으로 시각 매체(영상 단계)를 거쳐 추상적인 언어 기호(추상 단계)로 나아갈 때 학습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이론이다. 일상에서 영어로 직접 소통하고, 관련 영상을 시청한 뒤, 다시 책이라는 추상 기호로 접하는 것. 영어유치원에 보내지 않고도 교육 이론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딸 부부가 기특하기만 하다.
물론 고비도 있다. 재미있는 영상을 칼같이 멈추는 일은 다섯 살 아이에게 가혹한 시련이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 아빠가 리모컨으로 화면을 꺼버리면, 아이는 "많이 못 봤잖아!"라며 세상을 잃은 듯 1분간 슬픔에 잠긴다. 하지만 이내 사위가 책으로 관심을 돌리면 다시 공주님들의 세계로 빠져드는, 아이는 아직 어쩔 수 없는 '아기'다.
얼마 전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아이가 1층부터 50층까지 숫자 버튼을 영어로 줄줄 읽어 내려갔다. '넘버 블럭스'를 보며 더하기, 빼기 개념까지 터득한 모양이다. 자기가 사는 48층을 "Forty-eight"이라고 유창하게 읊조리는 쪼그만 아기.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영어로는 저렇게 잘 말하는데, 우리말로 "사십팔 층"이라고도 할 줄 알까? 다음번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혹시 "할머니, 사십팔이 뭐야?"라고 되묻지는 않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