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이의 무게를 배우다.

by 해림

오늘 나는 공원묘지 봉안당의 잔금을 모두 치렀다는 영수증을 받았다.


최근 구순인 친정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장자인 오빠는 어머니의 안식처를 미리 마련하지 못한 것을 내내 마음 무거워했다. 지난 구순 생신 때, 우리 형제들이 모여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던 이유다.


사십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고향 땅 산소에 계신다. 하지만 그곳은 문중 땅도 아닌 먼 친척 소유의 땅일 뿐이었다. 남의 땅에 홀로 누워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 역시 늘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오빠는 오랫동안 아버지 산소와 인근 조부모님의 묘소까지 정성껏 벌초하며 장남의 도리를 다해왔다.

아버지는 오빠가 겨우 대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당시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는 서툰 맏상제였다. 아버지를 모시는 일에서 오빠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회한이 남아서일까, 오빠는 어머니 생전에 온전하고 품격 있는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형제들은 뜻을 모아 추모 공원에 자리를 마련하고, 훗날 아버지 묘소도 이장하여 두 분을 함께 모시기로 결론을 내렸다.


타지역에 사는 오빠와 둘째를 대신해 인근 공원묘지들을 둘러보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만만한 남편과 함께 여러 곳을 살핀 끝에, 자손들에게 부담이 적고 관리가 수월한 봉안당을 최종 선택했다.


사실 나는 시누이가 다섯인 집안의 외며느리다. 외아들인 남편 역시 대학 시절, 불과 6개월 사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연이어 떠나보내는 극한의 상황을 겪었다. 그 상흔 때문인지 남편은 묘지 관리와 제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왔다.

남편은 친척 땅에 급하게 모셨던 할아버지의 묘를 선산 할머니 곁으로 이장하여 합장하던 날, 무척이나 감격스러워 했다. 젊은 시절, 그런 관념이 희미했던 나는 남편의 집착이 버거워 여러 번 반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과 오래 살다 보니, 그리고 최근 오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면서 이제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가장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그 슬픔의 깊이를 내 어찌 다 가늠할까. 못다 한 효도를 묘지에라도 쏟아붓고 싶었던, 장남들의 절박한 속죄였으리라.


오빠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4학년이었던 나는 오빠보다 아는 게 더 없었다. 그저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게 싫었고, 어머니마저 잘못되면 어쩌나 겁이 났을 뿐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몇 달 뒤, 오빠가 수학여행을 가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오빠에게 군것질이라도 하라며 고작 천 원 한 장을 쥐여 주셨다. 그런데 오빠는 그 돈으로 동생들을 위해 삼백 원짜리 나무 필통 세 개를 사 왔다.

동생들을 위해 구백 원을 쓰고 남은 알량한 백 원으로 오빠는 무엇을 했을까. 당시 어린 나는 오빠를 보며 왜 저리도 어리석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 먹고 싶은 거나 사 먹지, 참, 멍청하다’ 싶었다. 하지만 나는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 정형외과 의사가 된 오빠는 과로로 큰 병을 얻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형제들과 관계가 멀어져 서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가 무슨 엉뚱한 말을 해도, 어떤 서운한 행동을 해도, 나는 그 옛날 소년 오빠가 품에 안고 왔던 나무 필통을 잊어본 적이 없다. 자신보다 동생들의 빈 필통이 먼저 눈에 밟혔던 그 마음이 바로 ‘맏이’의 마음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동생들은 맏이가 안고 사는 서열상의 중압감을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아랫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평생 짊어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를 감히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추모 공원 계약을 마치며, 나는 다시 한번 오빠가 사 왔던 그 오래된 수학여행 선물을 소환해 본다. 투박한 나무 필통 속에 담겨 있던 그 깊고도 외로운 사랑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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