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집들이 사라졌습니다.

by 해림

토요일 아침, 남편은 시어머니 댁으로 향했다.


시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신 뒤 몇 달간 비워두었던 집을 완전히 정리하는 날이다. 주인을 잃은 낡은 장롱과 침대가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길가로 내앉는 날이기도 하다. 나는 도저히 못 가겠다며 남편을 혼자 보냈다. 친정어머니의 집을 여러 차례 정리하며 겪었던 그 지독한 ‘정리의 진절머리’가 도졌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을 거쳐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후, 친정집을 정리하던 날은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올 만큼 고통스러웠다. 압박 붕대로 칭칭 감은 손목이 퉁퉁 부어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50리터 종량제 봉투를 세 개나 채우고도 남았던 불교 법문 녹음테이프, 30년간 그리셨다는 문인화와 산더미 같은 그림 도구들, 그리고 이제는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인물들이 가득한 교사 시절의 수천 장의 사진까지.

어머니는 저장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분이었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고 홀로 남겨진 뒤로 그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싱크대 선반에 수백 개씩 매달린 비닐봉지, 냉장고 구석에서 썩어가는 음식들, 정글처럼 우거진 베란다의 화분들.


교사 출신인 어머니의 살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집은 황폐했다. 수년 전 어머니가 여행을 가신 틈을 타 낡은 가구와 부엌살림을 몰래 내다 버렸을 때, 어머니는 고맙다는 말 대신 잡아먹을 듯 화를 내셨다. 자식의 눈에는 '버려야 할 쓰레기'였으나,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억의 증빙'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십오 년 전, 우울증으로 수개월 입원하셨던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합가하고 마침내 그 곰팡이 핀 집을 완전히 정리하던 날, 나는 물건마다 담긴 어머니의 애증과 나의 분노가 교차하는 모든 짐을 처분했다. 내 눈에 건질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교사가 되어 마련해 드렸던 가전제품들조차 서른 해의 세월 속에 낡아버렸고, 주인 잃은 물건들은 속절없이 부식해가고 있었다. 합가 후 건강을 회복한 어머니는 사소한 물건까지 다시 기억해내시며, 못된 딸이 독단으로 소중한 것들을 버렸다며 두고두고 나를 원망하셨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얼마 전, 멀리 사는 동생이 면회를 왔다가 툭 던진 한마디에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제 여기 와도 갈 수 있는 엄마 집이 없어서 너무 서운해.“


동생에게 어머니의 집은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었겠지만, 그 집을 유지하기 위해 주말마다 달려가 오물이 묻은 주방 바닥을 닦고 냉장고 속 썩은 음식을 치워야 했던 내게 그곳은 '진절머리 나는 일터'였다. 자식들 간에도 집을 바라보는 온도는 이렇게나 달랐다.


남편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지친 기색으로 돌아왔다. 시누이들과 힘을 합쳐 시어머니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고 온 것이다. 남편과 시누이들이 북적대며 웃음꽃을 피우던 시댁도, 내가 온 힘을 다해 지키려 애썼던 친정집도 이제 이 세상에는 없다.


우리가 지키려 했던 ‘어머니의 집’은 소멸했고, 대신 주기적으로 찾아가야 할 요양병원 두 군데가 새로 생겼다. 노인들의 소변 지린내가 소독약 냄새에 희석되어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불쾌함, 그리고 초점 없는 눈길로 방문객을 바라보는 침상 위 노인들의 행렬. 그곳이 우리 어머니들의 새 주소이자 ‘어머니 댁’이다.

요즘 나는 물건이 무서워져 결혼사진조차 몇 장 남기지 않고 정리해버렸다. 어쩌면 어머니처럼 짐에 짓눌려 살지 않겠다는 처절한 다짐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더 들면 나는 극한의 미니멀리스트가 될 계획이다.


내 자식들에게는 내가 겪었던 그 무거운 ‘기억의 짐’을 절대로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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