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임신

by 이모리

내 안에서 인간이 만들어지고 있다.(아마도)


집 앞에만 나가도 발에 차이는 게 사람이다. 사람들이 ‘득실득실하다’는 표현을 써 가며, 우리나라 인구밀도 너무 높다고 고개를 젓곤 했다. 딱히 누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동네 사람들 절반만, 공원에 사람들 반만 다른 데로 가줬으면 좋겠다고도 자주 생각했다.


임신 과정을 겪고 알아가고 상상할수록, 바글거리는 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하게, 어렵게, 신비하게 맺어진 생명들인지 생각하게 된다. 일단 정자, 난자가 수정할 수 있는 기간부터가 한 달에 며칠 없다. 한 달에 약 5일이니 달마다 17% 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난다고 무조건 수정이 되지도 않고, 수정이 된다고 곧장 착상이 되지도 않는다. 모든 과정에서 때를 기다리며 운을 바라야 하는 일이다.


2025년에는 임신을 시도해 보자 하면서 배란일 세는 법, 가임기 세는 법, 임신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이제야 알았다. 2024년이 끝나면서부터 임신을 시도하겠다고 결심해서, 나는 2025년 1월에 임신해서 2025년 12월에는 아기를 낳고도 남을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내 인생이 꽤나 예측대로 잘 풀렸던 모양이다. 내가 정한 인생계획표대로 착착 진행되리라는, 아주 큰 착각을 이번 기회로 내려놓았다. 큰 배움이었다.




상반기가 꽤 많이 흘러 5월이 되어 다시 월경이 시작되니 자꾸 밀려나는 일정표를 떠올리며 초조하고 슬펐다. 괜스레 회사 탕비실 소파에 누워서는, 지나가는 회사 선배들에게 “아프고 우울해여...” 하고 칭얼댔다.


6월 월경일에는 회사 선배들에게 오가며 듣는 위로로는 성에 안 차, 엄마와 언니에게까지 전화해서 속상함을 토로했다. 엄마는 “요즘은 애기 갖는 것도 무슨 시험 보는 것처럼 그렇게 날짜를 다 정해서 준비하네.” 하셨고, 언니는 “너무 일정을 타이트하게 잡는 거 아니야? 우리는 그냥 그즈음이다 싶을 때 조금씩 시도하고 그랬어”라고 말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식의 무조건적 위로보다, 황당함과 신기함이 섞인 가족들의 현실적인 반응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평소에는 내가 몰두해 있는 회사 프로젝트에, 깨뜨리고 싶지 않은 운동, 일기, 경제공부 등의 일상 루틴에 에너지를 쏟다가 가임기가 되면 그것들을 다 내려놓고 남편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비장하고 대단한 마음으로 가임기를 맞으려니, 오히려 즐거운 관계보다는 숙제를 하는 마음이 들어 둘의 즐거운 잠자리가 퇴색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고 2주 뒤, 심지어 6월 가임기는 날짜를 착각해 3일이나 늦어버렸다. 에효. 글렀다 글렀어. 어쩌다가 남편과 잠자리를 가졌지만 이번 달은 이미 지났고 그냥 재미있는 시간으로 보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월경예정일 한 주 전부터 난생처음 느끼는 통증이 아랫배에서 느껴졌다. 먹은 게 탈 났을 때 아픈 곳보다는 훨씬 아래였고, 월경통이라기엔 느낌이 미묘하지만 분명히 달랐다.


“임덕이가 생기고 있나 봐.”


“??? 이번 달 가임기 지났다고 했잖아?”


“모르는 일이야... 옆에 부장님도 둘째가 언제 생겼는지 모르게 생겼대.”


남편에게 이건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부위의 통증이라고 착상통이 틀림없다고 외쳤다. 남편은 착상통이라는 게 내가 지어낸 말인 줄 알고 검색까지 했다. 진짜 있는 증상이라고!


자체 착상통 진단을 내리고, 올 것이 왔다는 마음으로 월경시작일을 며칠 앞두고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테스터가 3개는 들은 줄 알았는데 딱 하나 들어서, 시작일인 6월 9일까지 꼬박 기다렸다.


6월 9일, 오전 6시가 채 안 되어 눈이 떠졌다. 마음은 비장하나 차분히 숨을 쉬고 테스트. 판독 부분에 소변이 닿자마자 줄이 선명하게 올라왔다. 아. 왔구나.


어제 남편과 어떤지 무뚝뚝하게 인사를 나누고 잠들었기에 바로 가서 안기거나 먼저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궁금한 건 너지 뭐. 다시 차분히 가서 누웠다. 천장을 보고 다시 조용하지만 깊은숨을 내쉬었고, 눈을 감고 또 깊은 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남편 침대로 가서 눕는다.

“인사해.”

내 배, 착상통이 있는 아랫배에 남편 손을 갖다 올렸다.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남편에게 한 번 더, 인사해... 말했다.


“진짜야?”하고 되묻더니, 일부러 느린 숨을 만들어 쉬는 나를 뒤로 하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 둔 임신테스트기를 보고 “진짜네. 헐.” 하고 돌아와 나름의 오두방정을 떠는 남편. 어젯밤을 냉랭함은 사라지고, 두 줄이 어떻게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게 선명한지... 각자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으로 있었다.


희미한 줄도 아니고 아주 진한 선이었다. 당장 내 배가 엄청 불러오거나 몇백 그램 몇백 킬로짜리 아기가 들어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며 최대한 침착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임산부다’를 하루 종일 속으로 읊조리게 되더라. 왠지 걸음도 뒤뚱뒤뚱, 계단도 걸으면 안 될 것 같고, 일하는 게 무리일 것 같고, 임산부라 가뜩이나 힘든데 요리는 할 수 없을 것만 같고... 그러니까, 좋은 핑계가 생긴 셈이다. 하기 싫은 일(출근, 설거지, 빨래 개기 같은)은 ‘임산부에게 무리가 되는 일’로 다 묶어다가, <임산부가 절대 하면 안 되는 5가지> 같은 무시무시한 일로 퉁쳐 놓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은 내 뜻과 반대로 말했다. 스트레스가 절정에 이를 만큼 고도로 위험한 직장살이는 하지 말라고 안 하고, 지난한 일상의 소소한 낙, 무용이나 요가, 수영, 뛰기 같은 일은 하지 말라고 한다. 이거라도 안 하면 나는 끌려가는 소처럼 일하고, 늘어져 자다가, 다시 소처럼 끌려가 일하다가 애를 낳아야 한다. 이게 맞아? 팔팔한 몸은 못 움직이게, 늘어지는 마음을 억지로 끌어올리게 하는 게 임산부의 절대 안정이 맞냔 말이다. 적어도 내 상식과는 맞지 않는다.


안정을 취하라면서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일상을 며칠 보냈다. 문득 체온을 재 보니 코로나 양성 때도 갖은 몸살에도 없던 미열이 있다. 어쩐지 몸살처럼 몸도 아프고 눈도 감기더라니. 1년에 한 번 낼까 말까 한 연가를 내고 하루 푹 쉬었다. 초등학생 때 여름방학처럼, 더 이상 잘 수 없을 만큼 자고, 책 몇 권을 쌓아놓고 뒹굴었더니 금세 36.4도로 회복했다. 울렁거리던 속도 잠잠해졌다.


괜찮아졌네, 이참에 아파서 병가를 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다시 출근했다. 운전하는데 속이 메스껍다. 종일 출렁이는 배에서 난간을 잡고 멀미를 앓는 느낌으로 살았다. 퇴근해서 재보니 다시 37.4도. 나 절대 안정이 필요한데, 정말로 출근해도 될까?


이번 주 출근해 보고, 주말에 아기집도 보고 임신확인서도 받아 오고, 그래도 속이 파도치고 머리가 팽팽 돌면 다음 주는 과감히 연가를 사용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 똑똑히 들으시오. 건강에 가장 큰 적은 스트레스. 스트레스의 주원인은 사람들과의 관계. 관계 스트레스의 온상지는 회사. 임산부가 마음 편히 기분 좋게 있으려면, 출근을 막아야 합니다. 출근 안 하면 풀 스트레스도 없어요. 그럼 기를 쓰고 수영하거나 달리거나 춤을 추러 가지 않아도 되고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


다행히 유퀴즈에 나온 서울대 산과 교수님이 '가만히 있는 안정'은 근거가 없다고 해서 중강도 운동은 꾸준히 할 수 있게 됐다. 만세!


요가 물구나무서기, 수영 다이빙, 숨차게 움직이는 무용, 복근 운동까지. 가능한지 토요일에 산부인과 가면 다 물어보고 올 것이다. 유자녀 개인주의자의 행보를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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