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의 골목에서, 테바사키와 맥주
4월의 초여름 밤이었다.
부슬비가 내려 공기는 찼다.
우린 구글 지도를 보며 몇 번이나 길을 헤매다
노을이 졌을 무렵 좁은 골목에 위치한
이자카야를 어렵사리 찾아냈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 같은 곳을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던 날 위해
네가 밤새 찾아 준 술집이었다.
먼지 앉은 노란 조명이 희미하게
목재 간판을 비추고 있었다. <むつみ(무츠미)>.
대나무발 가림막이 쳐진 가게 앞엔
어스름한 붉은 풍등 하나가
행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 사람 들어갈까 말까 한
좁은 나무문을 드르륵 열자
매콤한 향이 물큰 풍겨온다.
‘いらっしゃいませ!(어서오세요!)’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레게머리 점원이 힘차게 인사한다.
우리는 문 바로 앞에 있는 다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옆에 앉은 일본인 커플은
한 손엔 맥주 한 손엔 담배를 든 채
내용 모를 수다가 한창이다.
“뭐 먹을까?" 네가 묻는다.
“나고야는 테바사키가 유명하다고 하니까. 우리도 먹을까?” 내가 답한다.
테바사키 담백한 맛 네 꼬치, 매콤한 맛 네 꼬치.
달콤 고소한 간장계란밥 한 그릇과 생맥주 두 잔.
여행 둘째 밤을 장식할 꽤 괜찮은 메뉴다.
우린 비닐장갑을 한 손에 끼고
너나할 것 없이 매콤한 맛부터 집어 든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너를 따라
어느새 입맛마저 닮아버린 나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테바사키를 한 입 가득 뜯어 먹자
고춧가루 베이스의 간간한 향신료가 입맛을 돋운다.
속은 살짝 오일리하고 부드럽다.
“어때, 기대하던 맛이야?”
입을 열심히 우물거리던 넌 만족한 듯 씩 웃어 보인다.
“딱, 일본스러운 맛이야. 너무 자극적이지도 슴슴하지도 않은.”
오후 9시, 밤이 내려앉은 나고야 뒷골목 술집거리.
주방 안을 떠도는 낯선 일본어와
쉴 새 없이 술잔을 부딪치는 젊은이들.
토독 토독 내리는 빗소리와
비에 젖어 희미해진 담배 향기.
온종일 사찰을 여행하며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 그날 마신 맥주는 유독 달았다.
일본에 가면 꼭 마시기로 약속한 기린 생맥주였다.
어쩌면 술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이번 여행 하이라이트는
이 시원한 맥주 한 잔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일 아침을 위해 딱 한 잔만 마시기로 다짐했건만
그새 대여섯 잔이 자리에 쌓인다.
“우리 연말엔 비행기 타고 유럽을 놀러가자.
영국 밤거리에서 와인 한 잔과 함께
근사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거야.”
내 말에 너는 늘 그랬듯
내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담으며 답했다.
“낭만적이네. 일이 그땐 많이 안 바빴으면 좋겠다.”
“결혼하기 전엔 이곳저곳 많이 놀러다는 게 최고래.
아이들이 있으면 어쩌면 어려울 테니까.”
“역시, 그렇겠지.”
우린 그렇게 다음 여행지를 기약했다.
그땐 너와 나 사이에 또 어떤 추억들이 쌓일까.
그 날 영국의 밤도 오늘처럼 더없이 따뜻하고 고요할까.
우리는 가게 문을 닫는 자정까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여행지들을 회상했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큭큭 웃었다.
그날 테이블 아래에서 잡았던 네 손은
어느 누구의 손보다 따뜻하고 좋아서
되도록 오래 맞잡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떠난 첫 해외여행.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 일본.
그 사흘 남짓했던 추억을
난 어느 날의 기억보다 마음에 짙게 새겼다.
우리가 이별하던 순간에도
그날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났다.
차라리 과거에 존재했던 추억이 아니라
허상에 가까운 꿈이었으면 좋았을련만.
눈만 감으면 그날 그 곳에서
여전히 네 손을 잡고 있는 내가 떠올라 많이 울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 관계는 일본에서의 우리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걸.
네가 내 손을 놓았을 때
더 이상 네 손을 잡으려 애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너는 어쩌면
우리가 영국에 가지 못할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직 나만 우리 사이 인연이
몫을 다했단 걸 모른 채
감히 설레이고 먼 미래를 꿈꿨나보다.
누군가 말했다.
좋은 이별이란 수많은 기억들을
애틋한 추억으로 마음에 저장하는 거라고.
네겐 소소했을지도 모를 그 짧은 밤을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묻지 못하고
미련처럼 남겨두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 밤의 추억도 어김없이 마음에 흘러들어왔다.
가끔은 날 아프게 했고, 미소 짓게도 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느 이별이 그렇듯
나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찾아왔다.
이젠 텅 비어버린 너의 옆자리를 맴돌지도
과거형이 되어버린 추억들을 떠올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너를 잊어갔다.
그래도 먼 훗날 너를 우연히라도
길에서 마주친다면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날 그곳에서 나와 함께해줘서 고마웠다고.
나의 삶을 스쳐간 수많은 시간들 중에
가장 따스하고 행복했던 밤이었다고.
“잘 지내, 나의 추억이 된 사람아”
지난해 9월.
약 3개월 간의 글쓰기 강의를 마치고
마지막 에세이 과제였던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주책맞게 펑펑 울며 쓴 글을
제 소중한 공간에도 살짝 업로드 해봅니다.
그 땐 한 번 읽고 울고 두 번 읽고 울었는데
이젠 여러 번 읽어도 울지 않네요.
브런치 작가님들의 말씀대로
아픔에서 저, 비로소 강해졌나봐요.
다들 그리 아프지 않은 사랑을 하시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