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월, 나를 건져낸 계절

모든 걸 잃었던 여름 끝에서

by 리우화

2024년 6월.


그해 여름은 끔찍했다.

삶을 지탱하던 여러 축이 동시에 무너졌던 날.

한 여름 무더위보다 더 지독했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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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생각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사랑한다, 예쁘다- 그 흔한 말 한 번 안 해준 사람.

나보다 늘 자신의 앞날이 먼저였던 사람.


"잘 헤어졌네,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

친구들의 위로에도 한 달을 앓았다.


한 번 사랑을 시작하면

심장의 반을 내어 주는 내게

이별은 교통사고와도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흔을 안고 매일을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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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서 허우적대느라 신중함을 잃었다.


작은 실수들이 반복됐고

기사 마감은 자꾸 늦었다.


경제기사는 숫자를 계속 틀렸다.

취재를 해야 하는데

핸드폰만 수 십번 들었다놨다.

누군가 말을 걸기만 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신차려. 기사를 이 따위로 쓰면 어떡해?"

내 이별을 알고 있던 상사는

한 마디 더 질타를 얹으려다 꾹 참는다.


노트북 앞에만 앉으면

밀물처럼 쏟아지는 지난 추억들.


다신 돌아가지 못할 시간 속에 잠긴 채

밭은 숨을 몰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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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야, 우리 여행가자.

이젠 과거를 훌훌 털어야지.”


친구가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비행편을 보내줬다.

청록빛 바다가 별처럼 반짝이는 그 곳.


“네가 좋아하는 수영도 맘껏 하고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자.

그래, 여행을 다녀오면 뭐든 게 달라져 있을거야.

그 넓은 바다에 네 아픔을 흘려보내고 오자”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잠시 고통이 느슨해지는 걸 느끼며

항공권에 내 영어 이름을 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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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하루 전, 오후 5시.

친오빠의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방 한 칸에 미처 다 싸지 못한 여행 짐.

오늘도 마감이 늦은 실수투성이 기사.

이별의 아픔을 넘는 죽음이란 상실감.


덤덤한 척 검은 옷을 갈아입다가

스러지듯 바닥에 주저앉고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나를 짓누르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최악이 되어보라’며 목을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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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을 치루고 올라 온 서울.


밝은 웃음으로 가득 찬 사람 숲을 헤치고

조용한 오두막같은 집에 들어가

며칠이고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칩거했다.


시간이 약이라던데.

나는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었다.

눈에 안 보이는 먼지가

집요하게 마음 안 쪽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글쓰기 수업 광고.

‘주 3시간, 세 달 과정. 당신의 마음을 기록해보세요.’


무너진 마음을 어디든 기대고 싶었던 나는

수업 신청서에 이름을 올렸다.


그와 눈을 맞대며 웃던 금요일 저녁.

이젠 나 홀로 펜을 쥔 채

텅 빈 종이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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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안 글을 써 왔지만

수업은 다시 나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책도 읽고 영화도 봐야 해요.

나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나를 되돌아봐야 하죠."


강사님의 말씀을 따라

몇 달만에 영화 한 편을 봤다.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였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회복됨을 느꼈다.



아침마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몇 년 전 날짜에 멈춰 있던 일기도 다시 썼다.


잠자던 블로그도 재개했으며

드문드문 가던 헬스장도 매일 출석했다.


강의의 마지막 과제는 에세이 한 편.

나는 그와 함께 떠났던 일본 여행 이야기를 썼다.


AF 5장에 빼곡히 눌러 담은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던 그 날의 온도와 눈빛.

타자를 치며 울고 싶을 땐 참지 않고 울었다.


그 여름의 끝에서,

나는 끝내 무너지지 않고

천천히 아픔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오전엔 기사를 쓰고

저녁은 운동에 몰두하며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레 업무에서의 실수는 줄어들었고,

기사의 완성도는 높아졌다.

단독 보도를 연이어 터트리며

어느새 ‘회사 에이스’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그해 겨울엔 난생 처음 바디프로필을 찍었다.


네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장을 나갔고

하루 세 끼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나를 통제했다.


목표였던 몸무게보다

더 낮은 몸무게로 촬영을 마쳤고

언론사 합격 이후 최고의 성취감을 느꼈다


이 무렵, 삶을 대하는 시각이 바뀌었다.

내 모든 행동과 생각이 허물 벗듯 과거에서 깨어났다.


이별 극복을 넘어

내가 살아오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힌 기분이었다.


나는, 낯설 만큼 새로운 내가 되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의 나를 되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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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맞지 않던 기자 옷을 벗었다.


사회적 명예와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

꺼끌대던 옷을 너무 오래 입었나 보다.

옷을 벗고 나서야

몸에 남겨진 수 많은 상처가 보였다.


혹여 돌고 돌아 다시 기자가 되더라도

이번엔 내게 맞는 자리를 찾아

기꺼이 모험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4월, 이 브런치에 연재 중인

중국 배낭여행을 떠났다.


수 많은 도시를 다니며 세상을 넓혔고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를,

새로운 운명의 사람도 만났다.



다시 사랑하는 게 두려웠던 나를

천천히 바꿔 놓았던 사람.


내가 다시 사랑받아도 괜찮다는 걸

눈빛과 손길로 알려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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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사랑도, 상실도, 좌절도 지나

어느새 다시 여름이 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삶에서 가장 아팠던 시간이

가장 온전한 나를 만들어 주었다.


부셔졌던 나를 조각조각 다시 붙이며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고

비로소 나답게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고민은 많다.

소나기처럼 힘든 일도 종종 찾아오고

깊은 한숨에 나를 흘려보낼 때도 있지만.


이제는 안다.


아픈 감정들에 한 없이 잠겨도

그 끝에서 다시 나를 건져낼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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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당신이 지금 어둠을 걷고 있다면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많은 눈물을 흘리지 말기를.


겨울이 지나면 꽃이 피듯,

가슴이 벅찰 만큼 따뜻한 날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당신을 향해 오고있단 걸, 잊지 말기를.


내가 그랬듯이.

당신도,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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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브런치 작가님의 글을 읽고

문득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기록이 생각나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여행기 쓰다가 힘이 들면

제가 제 글을 읽고 힘을 내보려고요.

다음주부턴 여행기 리장 호도협(3)을

예쁘게 다듬어서 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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