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한 사람을 위한 교육,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고교학점제는 학생 개개인의 적성과 진로에 따라 다양한 과목을 선택해 이수하고, 일정 학점을 취득하면 졸업하는 제도다. 이는 단순한 교육과정 개편을 넘어, 학교 교육의 방향성과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포괄적인 개혁이다. 그런데 이 제도에 ‘최소성취수준 보장’이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책무가 추가되면서, 현장의 교사들은 새로운 교육 철학을 실현하기도 전에 기초학력 미달 문제를 떠안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 문제는 단순히 특정 과목의 성취도를 보장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간 초중학교에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학습결손과 교육 불평등, 학생 개별의 학습 이력 부재, 정서·환경적 요인에 의한 누적된 교육 격차가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구조다. 이로 인해 고교학점제는 혁신의 출발점이 아니라 누적된 문제의 마지막 방어선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초·중학교는 의무교육 체계 안에 있지만, 학생이 기초학력 수준에 미달하더라도 진급과 졸업에는 전혀 제약이 없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기초학력이 미달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진급’이라는 흐름에 따라 상급 학년으로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학생의 학습 결손은 더욱 누적되고 보완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이 어려워지며, 최소성취 수준을 넘지 못한 학생은 추가적인 학습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이는 제도 설계 상의 당연한 조치일 수 있지만, 정작 그 학생이 지난 9년간 제대로 된 성취 경험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 이 책임을 오직 고교 교사에게만 묻는 것은 교육 체계의 연속성과 책무성을 무시한 처사다.
초·중학교에서 기초학력 보장을 위한 진단과 조치는 일부학교에서는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학기 초 기초학력 진단에서 미달로 분류된 학생들이 학기 말에는 ‘향상’된 것으로 처리되지만, 이듬해 같은 유형의 진단에서는 다시 미달로 나온다. 이러한 ‘기초학력 리셋’ 현상은 교육 행정이 실질적인 문제 해결이 아닌 통계적 정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학생의 기초학력 이력은 다음 학년, 다음 학교로 연계가 제한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다. 개인정보 보호와 학습 낙인 우려를 이유로 데이터 공유가 제한되어 있어, 결과적으로 학생 한 명의 교육적 맥락은 매년 새로 시작되는 셈이다. 이는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교육의 연속성을 시스템 차원에서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단계에서 최소성취 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현실적인 시스템은 미비하다. 학생의 학습 부진을 보완할 수 있는 방학 중 집중수업, 별도의 교과 편성, 전담교사 배치, 보충수업 수당 지급 등은 실제 운영되는 학교에서 거의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교사의 업무 부담은 증가하지만, 제도적 지원이나 처우 개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교사들은 현실적으로 학습 부진 학생을 온전히 지원하기 어렵고, 일부 학생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학업성취 처리나 교사의 판단에 의한 통과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상은 높지만 실행 가능성은 낮아, 현장의 작동 가능성이 낮은 제도적 선언에 머물 수 있는 위험성이 크다.
고교학점제는 단순한 교과 편성의 변화가 아니라, 출결 관리, 학점 인정, 수강 신청, 성취기준 도달 여부 판단 등 복잡한 행정 절차를 수반하는 제도다. 문제는 이러한 행정 업무가 교사의 수업, 생활지도와 동시에 이뤄진다는 점이다.
특히 교사는 학생 개개인의 수강 과목, 학점 이수 여부, 성취 수준, 보완 학습 진행 상황 등을 일일이 확인하고 기록해야 하며, 이에 따른 문서 작성과 교육청 보고 업무도 반복된다. 이런 구조는 교사의 업무 부담을 가중시키고, 제도의 취지를 흐리게 만든다.
따라서 전담 행정 인력 배치, 행정 지원팀 신설, 수강 관리 시스템의 자동화가 시급하다. 교육청 차원의 표준화된 매뉴얼과 지원 시스템 구축도 병행돼야 한다.
아울러 담당 교사의 시수 조정과 행정업무 분산을 위한 보조 인력 지원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교사가 교육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적 기반이며, 고교학점제의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고교학점제를 시행한다고 해서, 고등학교 한 부분만 바뀐다고 해서 교육이 혁신되지 않는다. 교육은 유·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는 연결된 과정이다. 한 단계를 별도로 떼어내 혁신을 시도하는 것은, 기초가 흔들린 건물 위에 상층부만 개보수하는 격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고교학점제는 단지 새로운 제도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공교육이 만들어낸 문제의 축적이 드러나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초등에서 시작된 학습 부진, 중등에서 방치된 동기 저하, 그리고 고등에서 폭발하는 성취 부담을 본다.
고교학점제가 성공하기 위해선, 의무교육 단계에서부터의 철저한 성취 관리와 기초학력 보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고등학교만 바뀌어서 될 일이 아니라, 모든 학교가 교육의 책임성을 공유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교육의 연속성과 책무성을 다할 때 이 제도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최소성취수준 보장은 교육이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학습을 통해 최소한의 성취를 이루도록 돕는 일은 교육의 출발점이자,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이 기본 책무의 무게를 고교학점제라는 새로운 틀에 얹은 채, 그 부담을 오롯이 고등학교 교사에게만 지우고 있다. 마치 고등학교 교육과정만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현실을 오인하는 접근이다. 문제의 뿌리는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제도의 확장이 아니라, 교육의 뿌리, 곧 초·중학교 단계에서의 책임교육을 함께 바로 세우는 일이다.
2025. 8. 18. (월)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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