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코인 Mar 04. 2022

스무 살의 은둔형 외톨이와 화해할 수 있을까

스무살, 독서실, 희망은 아름다운 감옥

(*본문의 글은 '그냥 알바로 여행한 셈 치겠습니다' 저서에 수록된 완성본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고등학교 삼학년 겨울에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요즘처럼 누구나 다 쉽게 대학에 진학하는 시절에는 집안 사정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하는 경우가 드물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도 있지만, 우리 집은 예외였다. 12월 중순까지 꼭 입금해야만 하는 대학등록금 얘기를 아빠에게 처음 꺼내고 얼마 뒤에 있었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늦은 시간에 엄마가 귀가하자마자 욕설과 함께 윽박지르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인마, 3천만 원 언제 가져올 건데."


  "누가 안 준댔어? 내년에 성공하면 갚는다고."


  "내년? 지금 대학 등록금 내야 한다 안 하나."


  "일단 모아둔 걸로 내 줘 봐. 지금은 없으니까."


  "니 대출해간 거 다 어디 갔는데."


  언성이 높아지는 둘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곧이어 알게 되었다. 수년 전부터 화장품, 휴대폰, 건강 매트 등의 다단계를 전전하고 있었던 엄마가 최근에 집 담보 대출로 3천 만 원의 빚을 졌다는 사실을. 손가락과 허리에 산업재해를 당한 탓에 오랫동안 고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한 아빠에게는 저축해 둔 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엄마와 아빠 모두 400만 원 가까이 되는 등록금을 지불하기 싫어서 서로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난 못 준다. 네가 가져갔으니까 네가 내라 인마."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 그것도 마련 못 해줘?"


  그렇게 밤새 서로에 대한 비난이 오가기만 할 뿐, 둘의 의견 차이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인연을 끊기라도 하듯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욱 속이 탔다. 추가모집으로 겨우 합격한 탓에 가뜩이나 입금 기한이 짧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입금 기한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을 때까지도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엄마는 아빠한테 말해보라고 할 뿐이었다. 아빠가 태평하게 잠만 자고 있다고 하면 엄마는 한 번도 가족 품 떠나 보지 않은 네가 타지에서 자취를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딴소리를 하거나 내년에 떼부자 되면 빚 다 갚고 대학도 보내줄 테니까 두고 보라는 식의 허황된 말을 내뱉고는 끝내는 바쁘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런 식의 무익한 대화가 마감 기한을 불과 몇 시간밖에 남겨두지 않을 때까지 몇 차례 더 반복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초조함을 느낀 건 엄마 때문은 아니었다.


  사기꾼들에게 세뇌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엄마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빠까지 무책임하게 계속 가만히 있는 모습은 좀 낯설었다. 분명 오늘이 마감 기한인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아빠는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낸 큰아버지에게 빌려보려는 최후의 시도도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티브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아빠는 내가 타지의 이름 모를 대학에 다니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게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수능을 망친 누나가 집 근처에 있는 그저 그런 대학에 진학했을 때 몇 날 며칠에 걸쳐 술을 마시며 비난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주기 싫은 대학 등록금뿐 아니라 거기에 맞먹을 정도로 비싼 보증금과 월세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엄두가 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빠가 자는 방문 앞을 몇 차례 서성이다가 그만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도 내가 진학하길 바라지 않는 대학을 막대한 돈을 구걸하면서까지 다녀야 한다는 게 좀처럼 내키지 않았다. 갈 수 있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합리화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다니고 싶은 대학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나는 그해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일차적인 이유는 집에 돈이 없기 때문이었으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게 맞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괜히 내 처지가 불행하게 느껴지면서 서러운 감정이 북받쳤다. 차라리 절반 정도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속 편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등록금을 나 몰라라 한 부모를 원망하는 마음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를 묻기는커녕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아예 없던 일인 것처럼 무심하게 구는 태도가 기분 나빠서 나는 대화 자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가 주방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는 소리가 들리면 의도적으로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쩌다 화장실에 가다가 아빠와 스치기라도 하는 순간에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빠와 다르게 엄마와는 할 말을 주고받았지만, 짜증 섞인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길거리에서 쓸데없는 가구들이나 화분들을 주워서 거실에 들여놓거나 가망도 없는 다단계 사업을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우기며 앨빈 토플러의 제 삼의 물결에 빗대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때로는 성질이 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지나가면서 괜히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탈모가 진행된 휑한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일이지만, 당시에 어떻게 해서든 삐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내 행동을 정당화했던 것 같다. 스무 살에 그런 큰일을 겪고 나서 이전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꼬여버린 내 인생이 어떤 의미도 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것만 같아서 나는 차라리 확 변해버리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성인군자는 못 되니까 부모를 원망하면서 더는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쪽으로 변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대학에 가지 않은 마당에 당장 남아도는 건 시간이었으므로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데 주저함은 없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난생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이었다. 부모를 욕하고 증오하면서 동시에 손을 벌린다는 건 말이 안 되므로 돈을 벌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이참에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서 살고 싶기도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알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구해질 줄 알고 카페, 피씨방, 식당 아르바이트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낙방을 거듭했다. 당시의 어둡고 주눅 든 표정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내심 하긴 했지만, 의지만으로 고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야간 알바생을 급하게 구하는 편의점에 운 좋게 테스트를 보러 간 적 있었다. 내 기준에는 손님들은 적은 데 자유시간은 많은 꿈의 아르바이트여서 어떻게 해서든 채용되고 싶었지만, 사수에게 일을 배운지 2시간 만에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막상 카운터 앞에 혼자 서보니 손님들이 혹시라도 느려터진 나를 비난할까 봐 무서웠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알려주던 사수가 나중에는 왜 한번 말한 걸 똑바로 기억하지 못하냐면서 언성을 높였을 때는 압박감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어느 상하 관계에서든 흔히 있는 꾸지람 정도였지만, 당시에는 어떤 비난의 말도 참고 인내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던 게 문제였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스스로의 나약함에 적잖이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당장 아르바이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대치를 확 낮춰서 이 정도면 나 같은 못난 인간도 할 수 있겠다 싶은 구인 모집 글을 물색했다. 그래서 고르게 된 게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 총무 아르바이트였다.


  급여는 한 달에 150시간을 일하고 고작 25만 원을 받는 수준이었다. 당시에 시급이 5천 원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적은 액수였다.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주인아주머니에게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별다른 질의응답도 없이 바로 채용되었다.


  다음 날부터 나와서 일을 배워보니 사실 그 아르바이트는 '채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민망한 정도이긴 했다.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인사하기, 어쩌다가 손님들에게 계산과 자리배정 해주기, 마감 시간에 간단한 청소와 문단속하기가 다였다. 그 외의 시간에는 카운터 자리에 있는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취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리 '배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아르바이트였다.


  애초에 희망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식료품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는 점이나 자유시간이 많은 점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그다음 날부터 계속 나오게 되었다. 독서실답게 모든 손님이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홀에 적막만 감돌았고, 그럴 때 내가 주로 한 일은 컴퓨터로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 계획도 목표도 없이 살고 싶진 않아서 차츰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내가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은 공모전은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문학상'이었다. 이름이 '청소년 문학상'이긴 하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은 아니고, 청소년을 위한 장편소설을 모집한다는 의미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으므로 역대 수상자들도 국문과나 문창과를 졸업한 데다가 아이를 길러본 경험까지 있는 노련한 30~40대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평균 경쟁률은 100대 1 이상으로 장편소설 공모전치고는 꽤 많은 편이었다.  


  단순히 수상자들의 면면이나 높은 경쟁률만 놓고 본다면 갓 스무 살에 대학도 가지 못한 내가 당선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을 것이다. 당시의 나도 힘들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청소년의 마음은 이제 막 청소년 시기를 지나온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에 학교폭력을 소재로 신문사에 소설을 투고해서 청소년 부문 상(경쟁률이 15대 1밖에 되지 않았다)을 받은 것 때문에 쓸데없이 자신감에 차 있기도 했다. 최연소로 당선되어 2천만 원의 상금을 거머쥔다면 대학에 가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고도 남을 것 같았다. 영광의 순간을 상상하면 할수록 희망으로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만 해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사실은 평범하고 능력 있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큰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희망에 더 목을 맨다는 것을. 그런 사람에게는 희망만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된다는 것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 학교 과제를 하다가 일본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본 적 있다. 거기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47세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오래전에 돈을 빌려 창업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망한 이후로 세상을 등진 채 부모님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 뒤로 20년 가까이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 신세가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참다못한 부모가 대안학교 직원들을 대동해 아들의 방문을 강제로 부수고 들어갔다. 한참 동안 괴성을 지르며 짜증을 내던 남자가 이윽고 잠잠해졌을 때 상담사가 그동안 무얼 하고 있냐고 물었다. 자칭 프로그래머인 남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소프트웨어를 오랫동안 개발하고 있었다고, 밤낮없이 작업해야만 하므로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에 상담사는 남자에게 직접 알려주진 않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헛된 희망을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리는 것이 은둔형 외톨이들의 공통점이라고 내레이션으로 설명했다. 그 순간에 화면 밖의 나는 조금은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꼭 스무 살의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독서실에서 일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그 남자처럼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냈던 것 같다. 남자와 다르게 집 밖에서 약간의 경제 활동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엄연히 사회생활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입구를 들락거리는 손님들이나 주인아주머니에게 의무적인 인사를 건넬 때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도 유일한 대화 가능 상대인 엄마와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내 방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던 엄마의 서류 상자들과 옷가지들을 죄다 버렸다. 혼자 요리해서 차린 밥과 음식들은 늘 방안에서 먹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대리운전하고 새벽에 돌아오는 아빠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오전 6시까지 독서실에 머물다가 귀가하곤 했다.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는 혼자만의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역시 사회적인 동물이어서 이따금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손님들이 퇴실한 시간대에 방 안으로 들어가 책상 벽면이나 포스트잇에 적힌 소망하는 말들 혹은 세상에 대한 비난의 말들을 발견하고 나서 혼자 키득거리기도 하고, 호기심에 여자 손님이 걸어둔 무릎 담요의 퀘퀘한 냄새를 맡으면서 왠지 모를 고즈넉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인사를 하면서 한 번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었던 손님들의 얼굴이 궁금해서 허락 없이 번호들을 저장한 뒤에 카톡 프로필 사진들을 넘겨다보면 그들과 조금은 아는 사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가끔 스스로의 행동이 비이성적으로 느껴져서 이렇게 사는 게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잘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애써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외로움에 초연한 편이라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람 만나는데 쓰는 시간을 온전히 글 속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구축하는데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애써 자부심을 가지려고 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다 보니 당연히 내가 쓴 글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굳이 내가 이제껏 쓴 방대한 분량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은 처음부터 다시 읽고 나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될까 봐, 그러면 수상 가능성에서 멀어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 되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남들의 객관적인 시각과 의견을 배제한 채 오로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서 쓴 글이 결코 좋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뒤늦게 이제껏 글을 잘못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




  독서실에서 일한 지 9개월쯤 지난 무렵이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카운터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그날따라 눈앞의 빛이 번져 보이는 것 같아 당황했다. 왼쪽 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만 떠보니 시야의 절반 정도가 희끄무레하게 가려져 있어서 큰일 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눈은 과거에 학교폭력을 당한 탓에 망막이 찢어져서 수술한 눈이었다. 얼핏 수술 이후에 의사에게서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작년 겨울 이후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안과에 곧장 찾아가서 갖가지 검사를 받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 난 의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의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예정된 정기검진을 오랫동안 받지 않은 탓에 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망막박리가 재발하게 되었다며 나를 질책했다. 볼 때마다 늘 초연하고 냉철하기만 했던 의사가 오죽 답답했으면 언성을 높였겠는가 싶어서 나는 더욱 작고 초라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은 우리 엄마가 다단계에 빠져 있는 바람에 알림 메시지가 온 것을 보고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나는 나대로 공모전을 준비하느라 차마 비싼 돈과 시간 들여서 정기 검진을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변명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말도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었다.




  눈 상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잡아야만 했던 재수술 계획은 집 근처의 대학병원에서 논의되어 이틀 후로 최종 결정되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당장 수술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마음이 탐탁지 않은 것을 무릅쓰고 엄마와 아빠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과거에 보험 설계사로 일했던 엄마가 내게 들어 놓았던 보험 덕분에 막대한 수술비는 아낄 수 있었고, 나는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수술 전날에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이제 더는 독서실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수술을 받고 안정을 취한 이후에 나와도 괜찮다고 설득했지만, 나는 이미 수술의 성공 여부나 호전 여부에 상관없이 더 이상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동안 검진을 받으러 가지 못한 게 독서실 아르바이트 때문은 아니지만, 삶의 여유를 빼앗은 데 조금은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9개월도 넘게 일한 아르바이트를 관두게 된 마당에 아깝거나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당일에 수술은 부분 마취를 한 이후에 3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안대를 낀 채로 병실에 누워 있는 사이에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뒤로 병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한 번씩 불려가서 첨단 기계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이틀째 되는 날에 이제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의사에게서 듣게 되었다.


  단안 실명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는데도 막상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안대를 풀었을 때 수술하기 전처럼 오른쪽 눈의 절반 정도가 희끄무레하게 보여서 두 눈으로 책을 읽을 때마다 글씨가 겹쳐 보이는 데다 초점 없이 눈에 힘을 빼면 약간 사시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막막함을 느끼긴 했지만, 오직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수술 이후에 병실에서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여태껏 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나 안 가도 괜찮을 거라고 아무 근거도 없이 넘겨짚었던 해이해진 정신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보상도 없이 자꾸 연쇄적으로 삶의 질이 나빠지기만 하는 현실과 제대로 된 현실 파악을 하기 힘들게 만들었던 희망에 얽매인 상태에 대해서 나는 자꾸만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내내 모른 척했던 문제를 뒤늦게 인정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여태껏 써왔던 소설을 끝까지 다 완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만 여러 방면으로 고심해 봐도 애초에 가장 많은 기대를 걸었던 소설의 결말 부분이 현실 세상에서 실현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허구인 소설이라고 해도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자아이를 한때 일진이었던 남자아이가 사랑하고, 여자아이는 따돌림과 세상의 편견을 이겨내고 당당히 마스크를 벗게 되는 결말은 너무 억지스러웠다. 그건 그냥 나만의 세계에서 지어낸 바람이나 판타지에 불과한 것 같았다. 꼭 그동안 청소년 문학상에 당선될 것이라는 희망을 실현 가능하다고 믿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여태껏 해왔던 글쓰기가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꼈다. 1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 동안 이룬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은 것만 많은 것 같아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내내 비참한 기분이었다.     


  그때 느꼈던 허무함과 상실감을 좀처럼 견딜 수 없어서 나는 계속 괴로움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서 한 차례의 검진을 또 받고, 이듬해에 등록금이 싸다는 이유로 하향 지원한 지방 국립대 문예창작과에 다니게 된 뒤에도 왠지 또래들보다 뒤처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합리화를 잘하는 습관 때문에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망막박리가 재발한 덕분에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히키코모리처럼 살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일 년 동안만 은둔형 외톨이로 산 게 어디냐, 거기에 등장하는 히키코모리들은 10년, 20년 동안 갇혀 지내지 않았냐. 처음에는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불쌍한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애써 위안을 얻으려는 삶의 태도는 살면서 그다지 습득하고 싶지 않은 태도가 분명했다. 그런 태도를 갖고 살아간다면 역으로 나보다 잘난 사람들 앞에서는 저절로 처지를 비교하면서 괴로워하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지난날의 못난 나와 화해하는 방법은 없을까. 역시 기억하지 않고 애써 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 나는 오랫동안 그런 사소한 질문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서 가끔 여전히 20살의 인생을 공백으로 놔둔 것 같은, 왠지 누구에게나 소중한 20살의 시간을 나만은 잃어버린 것 같은 씁쓸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아직도 본가 근처에 있는 독서실 앞을 지나갈 때면 그 암울했던 시절의 일들이 떠올라 조금은 가슴이 미어지기도 한다. 이 아픔을 오랫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남겨두는 게 싫어서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 같기 한데, 어쩌면 이 글을 쓴 많은 이유 중에는 그런 이유도 포함돼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어딘 가에서 '이야기 치료'라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어서. 그때의 불운했던 상황과 억눌린 감정들을 글로 표출하고, 그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면 조금이라도 좋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론 이런 글을 하나 쓴다고 해서 당장 과거의 못난 나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삶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




(ps. '대체로 가난해서' 매거진에 참여하기 위해 예전에 올렸던 글(4편)들을 묶어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원본 1편  :  스무살의 은둔형 외톨이와 화해할 수 있을까(1) (brunch.co.kr)





매거진의 이전글 두 번 철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