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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임 Nov 21. 2023

빨간 스파출라의 손 맛

저의 친구 실리콘 스파출라를 소개합니다.   

  

이 친구는 오랫동안 저와 살지는 않았지만, 지난 4년간의 요리작업 내내 동반했습니다.

그레이터에 긁히고, 믹서기 칼날을 강인하게 이겨내고, 수만 번을 씻기고 사용되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기나긴 시간을 묵묵히 일하며 견뎌낸 아이입니다.     


처음 저에게 와 대여섯 살 유치원 어린 친구들에게 집어던져지고, 잡아당기고, 흔들리고, 뜨거운 물에 처박히고, 낙상하고, 물리는 등 수많은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고구마 으깨고 거를 때, 빵에 딸기잼을 바를 때, 김밥용 밥에 깨, 소금, 참기름을 넣어 섞을 때, 두부 베이컨 말이 뒤집을 때 무거운 스테인리스 도구를 제치고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뿐인가요.     


작업실에서 소스 개발하며 수 차례 채반에 걸러지는 재료를 눌러주고 긁어주며 한 방울도 소홀히 하지 않고 내려주었습니다. 믹싱 볼에 모인 소스를 조용하고 섬세하게 모아주고 섞어주는 일을 늦은 시간까지 피곤하단 말 한마디 없이 오랜 시간을 버텨주었습니다.     


4년 동안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의 칼 가방에 고이 모셔 다니며, 이 산천길을 같이 걸었지요.


나무 스푼에 뒤지지 않는 볶음 실력을 보여줬습니다.

대형과 소형, 일체형이라 구석진 곳에 있는 재료까지 모아 모아내어 골고루 섞어줍니다.

생크림을 케이크에 바를 때 케이크 스파출라와 다른 모양새를 만들 수 있습니다.

쿠키 반죽 성형을 위해 랩에 놓인 반죽을 다독여 예쁜 모양이 나오도록 도와주고요.

토마토소스가 바닥에 눋지 않게 냄비 안 모든 자리를 저어주지요.     

작년 음식 축제 준비를 아이들과 함께하며 몸 사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집에서는 어디 쉬나요.


손맛이라는 낚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리에도 손맛이라는 게 있지요.

어떤 바다냐? 산이냐? 에 따라 낚싯대가 바뀌지요?

밖에서나 집에서나 넓적하고 기다란 손잡이가 있는 스파출라도 있어도, 아무리 조립된 것보다 일체형이 좋아하지만, 이 빨간 아이처럼 손맛이 좋은 도구도 없답니다.

너무 오래 같이 지내서 그런 걸까요?     


삼겹살 먹고 난 후, 칼은 안 써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낸 김치와 삼겹살 그리고 남은 반찬에 고추장과 참기름 넣어 고루고루 뒤적여 볶아 달걀과 김가루를 넣어 볶아주면 ‘스파출라야, 너는 네 할 일을 다 했단다.’라며 녀석 몸에 묻은 볶음밥을 밥그릇 윗부분에 쓱쓱 지나가 주면 밥 한 톨 욕심내지 않고 깨끗한 몸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빨간 스파출라가 하는 일을 열거하자면 한 도 끝도 없습니다.    

 

스파출라가 무엇이냐?


이 아이는 일명 알뜰 주걱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정성 담긴 요리를 작은 티끌도 남기지 않고 그릇에서 싹싹 긁어내 우리의 식탁에 올려 내줄 수 있는 도구이지요.     

어느 날 엄마가 노랑 손잡이에 빨갛고 넓적한 고무 재질의 밥주걱 같은 것을 가지고 와 “누가 만들었나 신통하네.”를 연신 말씀하시며 김치 양념이나 돼지갈비, 불고기, 꽃게 양념을 설거지가 가벼워질 정도로 딱딱 긁어 사용하셨습니다.

어찌나 신기했던지, 엄마가 알뜰 주걱을 이용하려 치면 “내가. 내가.”하며 동생들과 긁어모은 양념을 바닥에 흘려가며 요리조리 돌려 사용해 봤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요리에 사용이 되지요.


안타깝게도 이 녀석에게 주방에서 너무 많은 일을 시켰나 봅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머리 부분 힘이 많이 떨어졌네요. 그래도 무겁지 않은 일이라도 같이해보려 했지만, 아무리 씻겨도 끈적거리는 느낌이 이젠 위생상 주방에서 은퇴를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같이 다니며 한 번씩 만져주기만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녀석의 활용도를 찾은 것 같습니다.


주방 싱크 실리콘 작업하며 동생 두부가 사 온 마감용 실리콘 스파툴라를 써봤죠. 그때 감이 딱 왔습니다.

‘아! 이거구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만약 얼마 전 미장 할 때 썼던 고무통에 들어있는 몰탈 믹스를 이 녀석으로 긁어냈으면 깨끗하게 마무리됐을 텐데.

수돗가와 벽 구석진 곳에 몰탈 믹스를 케이크 시트에 하얀 휘핑크림을 바르듯 썼으면 편했을 텐데.

분갈이하며 화분 안에 붙어있던 흙을 물로 씻느라 고생을 덜 했을 텐데.

구석에 있는 먼지를 긁어내는데 유용했을 텐데.      


아!

제가 지금까지 주방에서 고생해 온 빨간 스파툴라를 악덕 고용주 마냥 쓰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멀리 보내고 아쉬워하며 그리워하는 것보다 옆에 두고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서 빨간 스파출라를 들고 옆에 마련해 둔, 공구 판에 놓아주었습니다.

이제는 주방에서는 볼 수 없지만, 텃밭이나 마당 그리고 집안일을 두루두루 도와주는 도구로 다시 돌아와 자신의 힘을 보여줄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자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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