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집 큰딸들은 아니 우리 큰 이모만 봐도 외할머니가 곱게 키웠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허드렛일부터 동생 넷을 돌보고 부엌일은 차녀였던 엄마 몫이었다네요. 그래서 억울했다는 말을 가끔 했었습니다. 그래 선가요 엄마는 큰 이모에 대한 모든 원망을 풀 듯 모든 심부름은 큰딸인 나에게 떠 넘겼습니다.
“엄마, 나 바쁜데 이번엔 애들 시켜.”
“애들이 언제 거기까지 갔다 오니, 네가 갔다 와.”
“난 주워 왔어.”
“끊는다.”
나의 외가는 서쪽 바닷가 섬들이 모여있는 곳 중 하나입니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조부모님 그리고 아직도 대부분 어부이거나 갯벌에서 일하는 외가 친인척들 때문에 조기, 장대, 박대, 꽃게, 바지락, 낙지 등 철이 된 해산물을 받으러 가거나, 사기 위해 섬이 아닌 군산으로 갔어다.
한 해에 한 번 꽃샘추위가 물러갈 4월 무렵 조기를 사러 가는 시기입니다.
냉동된 조기 상자를 적어도 네다섯 개 많게는 예닐곱 개까지 차에 실어야 했어요. 그러면 차 안 구석구석에 배인 조기의 비린내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두꺼운 포장 비닐을 준비해야 했죠. 그래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지만요.
집으로 돌아오면, 차 안에서 점점 녹아갔던 조기를 탁하고 바닥에 내려트려 조각조각 떨어진 것들을 주워 담아 녹이기 시작.
다음날, 적어도 네다섯 상자에 담겨있던 조기의 비닐을 벗겨야 했습니다.
흰 면장갑을 끼고, 그 위에 빨간 고무장갑으로 무장하고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칼을 들고 조기를 도마에 뉘어 비늘을 벗기기 시작했어요.
제가 철이 좀 들어가던 무렵 힘들어하는 엄마를 도와주겠다고 덤볐을 때만 해도 칼이 무서웠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엄마가 무서워졌습니다.
제가 도와드리기 시작하며 사들이는 양이 많아졌거든요.
솔직히 큰 놈들이야 들고 다듬기 편하지만 작은 것들은, 허리가 뻐근해 오고 손이 저려오기 시작하면 엄마 몰래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었죠. 애초에 선물이라고 준 상자는 들고 오지 않았어야 했어요.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서진아, 대방 삼촌이 광어 보냈다. 저녁에 집으로 와.”라는 엄마의 전화.
초인종을 누르는 날 반겨주듯 달려 나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두려움이 몰렸습니다. ‘도대체 이번엔 얼마나 큰 걸 보낸 거야!’
집으로 들어가면 식탁에 가득 차려있는 음식, 그리고 날 기다리는 도마와 칼.
가끔, 내 몸통만 한 대 광어를 삼촌들이 보내주면 감사하기는 하지만, 커도 너무 큽니다. 엄마 말을 빌리자면 "자연산이잖아. 돈 주고도 먹기 힘들다.”지만, 엄마 본인도 버거워하는 음식 재료 중 하나입니다.
비늘은 왜 이리도 크고 단단한지 잘 벗겨지지도 않습니다. 턱턱 걸리는 비늘이 이리 튀고 저리 튀어, 내 얼굴로 몸으로 날아올라 추워 히터를 틀 수 없고, 더워도 에어컨을 틀 수 없는 다용도실에 홀로 앉아 대 광어와 사투를 벌여야 했지요. 마지막 둥그런 대가리에 붙은 비늘을 벗기는 일이 관건이었습니다. 이렇게 비늘이 벗겨진 대 광어를 3장 뜨기 해 껍질을 벗겨 엄마에게 인도하고, 대바칼과 망치로 뼈와 대가리까지 분해가 마치면 어차피 버린 몸, 다용도실까지 청소를 마치고 빠져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