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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임 Aug 08. 2023

그린그린 #1

글쓰기 연습

어떤 글을 쓸까?라는 무의미한 고민을 버려야겠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멋들어진 주제를 가지고 휘황찬란한 글을 쓸 것이냐가 아닌, 어떤 주제를 주더라도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지금 내 주위에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찾아보자.


바로 그린그린.


축축하던 날이 가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뜨거운 날이 왔으면 하진 않았다. 이글이글 익어가는 날을 보낸 지 꽤 지난 느낌인데 아직도 에어컨을 끌 수 없는 텁텁한 날씨에 그리운 건 싱그러운 바람이다. 그래도 집안에 그리그린한 샤인머스캣, 아오리사과, 오이가 상큼한 열매들이 더위를 잊게 해 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집 주방엔 초록빛이 여기저기 보인다.


글 주제에 맞게 사진을 찍어보려다, 어제 마을회관에서 식사하시라 드린 푸르스름한 가지 그리고 오이, 단골로 부르는 택시 운전하는 언니와 태양광 사장님께 드린 탐스러웠던 조선호박도 있었으면 풍성해 보였을 터라는 욕심이 든다. 그래도 농사라고는 지을 것 같지 않은, 나와 내 동생이 나름대로 가꾼 수확물을 받아 들며 고마워하신 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난 철이 없다.


나의 온 신경을 쏟으며 샤인머스캣과 아오리사과 그리고 오이가 어떤 포지션으로 놓이면 좋을까, 이리저리 놓아보고 사진을 찍어보지만 영 소질이 없는 찍사다. 결국 아오리를 아싹 베어 물고 앉아 찍힌 사진들을 보는데, 더 찍는다고 좋아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막상 하나를 고르려니, 자꾸 그린그린을 모아 놓은 바구니에 눈이 간다.


주제와 사진은 마련했고. 그린그린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내 동생 두부가 딱하고 떠올랐다. 초록빛이 나는 음식은 맛이 안 좋다고 생각하는 여인이다. 단연코 불그스름한 색을 띤 음식들이 맛은 더 좋다고 말하는 그녀는 붉은빛 채소를 먹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고기가 좋다는 이야기를 녹색은 안 좋아한다고 돌려 말하는 걸 보면 아직도 애다.


지금 두부는 그전보다 초록색 반찬을 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작년에 만든 텃밭 덕에 깻잎지, 늙은 오이 국수, 청경채 & 죽순 볶음, 조선호박 짜글이, 부추·오징어볶음, 바질페스토, 열무나 배추를 넣은 파스타도 이젠 제법 잘 먹는다. 요즘 들어 오이소박이 만드는 법도 배우고 싶다는 걸 보면, 이젠 푸르스름한 채소도 먹을 만한가 보다.


하긴, 두부와 난 투박했던 텃밭을 기어 다니며 호미 하나로 땅을 파기 시작했고, 이젠 남들이 부러워하는 기름진 땅으로 만들기까지 무단한 열정을 묻었다. 그런 텃밭에 두부와 내가 애착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맛없다는 초록색이 두부의 혀끝에 맛있어졌다기보다 감동의 맛을 느끼고 있겠지.


나도 텃밭을 가꾸고 살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귀촌이라는 것은 ‘그러면 좋겠다.’라는 꿈같은 상상이었을 뿐, 정말 초록이 너울지는 논밭 사이에서 사는 나를 도시에서만 살아본 내가 보아도 신기하다. 하지만 5년째 살면서 한 번도 도시로 돌아가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앞서 말했듯 난 농어촌 지역을 동경해보지 않았지만, 도시보다 도서 지역이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초록이 무성한 논밭 사이에 살고부터 산속 암자에서 지내는 날이 없어졌다. 혹여라도 갈라치면 당일치기로 들리지, 자고 오는 일이 없어졌다. 전엔 젊은 놈이 절에 너무 자주 온다며 혀를 끌끌 차던 스님도 이제는 ‘쉬었다 가지, 뭘 벌써 가냐?’는 아쉬운 말들을 남기시고, 내가 챙겨드리었던 밥상을 스님이 차려주신다.


난 아침에 일어나 요사채 창문을 열었을 때, 녹색 나뭇잎 끝으로 피어오르는 안개를 좋아했다. 새벽녘에 걷는 초록이 무성한 숲과 개울이 보이는 길을 걷고 있으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쉬는 동안, 대밭에서 쭈삣쭈삣 오른 진녹색 죽순과 연둣빛 둥근 호박을 넣은 만두를 스님과 절 식구들에게 만들어 드리면, 모두가 행복한 주말을 보냈었다.


지금은 두부와 같이, 텃밭에서 딴 연초록 호박으로 만두를 빚어, 이 산천에서 사귄 나이도 성별도 따지지 않는 친구들을 초대해, 거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밥상을 마주한다. 난 그러고 보면 절이 좋아서 갔다기보다 그린그린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는 절에 사는 스님이 걱정돼 찾아가는 길을 택하지, 요사채 창문으로 보이던 풍경을 부러 보러 가지 않는다.


문만 열면 상큼하고 시원한 초록색은 언제나 볼 수가 있고, 마당에 깔린 초록색 잔디에서 강아지와 뛰놀 수 있으며, 10평이지만 우리에겐 대농 같은 텃밭에서 푸르른 채소들을 딸 수 있다. 그러니까  난, 지금까지 초록색을 따라다니다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젠 좋아하는 것을 적으려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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