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에서 영어로 일하기
사실 내 기준에 '대외활동'은 지극히 한국적인 용어다.
미국에서는 기업이 학교와 파트너십을 맺고 워크숍이나 커리어페어 등을 통해 학생들과 교류하거나 알음알음 네트워킹을 통해 비공식적인 인턴/봉사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는 있어도, 공개적으로 서포터즈, 기자단, 공모전, 봉사활동 같은 대외활동 공고를 올리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의 여파로 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스펙이라 할 만한 것을 쌓기가 상당히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전에 연구실이나, 심리상담센터에서 일한 경험(5화, 6화 참조)은 심리학이라는 전공 분야에 크게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졸업 후 회사 취직이라는 옵션을 포기할 게 아니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결심을 기반으로 대외활동 공고를 확인하고 지원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1) 검색 사이트와 2) 네이버 카페였다. 이런저런 대외활동 검색 사이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쓰기 쉽고 편하다고 느낀 것은 링커리어였다. 각종 키워드나 검색 필터를 활용해서 내 관심사와 활동지역, 기간에 적합한 대외활동 공고를 찾기 쉬웠다. 그뿐만 아니라 커뮤니티에 들러 대외활동 지원이나 활동 후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네이버 카페는 스펙업을 가장 많이 이용했는데, 주별로 뜨는 추천 대외활동 리스트를 쭉 보고 골라서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해외 유학생이기 때문에 지원 자격 요건에 '국내/외 대학생'이 명시되어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했고, 그렇게 거른 대외활동 중에 한 언론사에서 주관한 마케팅 프로젝트에 최종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타 대외활동에 비해 참가비용이 좀 비싼 편이었지만 당시 마케팅 직무에 막 관심을 가졌을 때라 기업과 현직에 계신 전문가들 말씀을 듣고, 결과물을 피칭할 기회가 포함된 것만으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결과물이라 함은 팀마다 배정된 기업에서 내놓은 마케팅 관련 과제에 대한 답변을 실제로 실행에 옮겨보고 최종 pt를 진행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속한 팀은 한 영화사의 브랜드 인지도와 경쟁력을 높이고 극장 공간 활용을 최대로 하라는 과제를 맡게 되었다. 약 5개월 동안 열심히 활동한 끝에 피칭한 내용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기존 프리미엄관 적극 활용 -> 호텔 컨셉 인테리어와 특정 좌석 어메니티 제공, SNS/오프라인 이벤트 진행 및 추첨을 통해 프리미엄관 이용권 제공 => 고급 브랜드로 리브랜딩, 전반적인 인지도 상승
관객 수가 가장 많은 지점 근방 창작촌 아티스트분들과 협업을 통해 영화 관련 예술품 전시 => 색다른 문화 경험 제공을 통해 타 브랜드와 차별화, 지역 활성화에 기여
당연히 전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기간과 예산 내에서 열심히 해 본다고 노력한 끝에 짧은 전시와 홍보물 촬영까지 진행할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기로써 기업과 팀원들, 아티스트분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경쟁 pt와 최종 pt를 이끌며 큰 뿌듯함을 느꼈다. 같은 조건 속에서도 더 체계적으로 좋은 결과를 낸 다른 팀을 보고 배운 것 또한 많았던 좋은 경험이었다.
그러고 인턴에 지원하기까지는 사실 한참이 걸렸다. 학교로 복귀한 후에 거의 바로 대학원 준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때쯤엔 심리/교육학 분야에 종사하는 데에 훨씬 더 큰 자신이 생겼지만, 그래도 직접 비교가 될 만한 회사 경험을 제대로 쌓아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HR 관련 직무를 경험해 보자 해서 알아보다 발견한 것은 외국계 대기업인 B사의 조직문화 인턴 공고였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후기도 별로 없었고, 솔직하게 말하면 평소 B사의 제품인 T 앱을 자주 이용하던 것도 아니어서 고민됐지만 '일단 지원이나 해 볼까?' 하고 지른 것이 어느새 3차 면접까지 이어졌다. 2차 면접에서 왜 정규직으로 지원하지 않았냐는 말을 듣고 조금씩 충전되던 자신감이 최종 합격 통보와 함께 입사 축하 굿즈를 받자 크게 차올랐다. 역시 뭐든 '합격하셨습니다'라는 문구를 볼 때가 제일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자면 서울 오피스에서의 포지션이었지만 내가 배정받은 팀의 다른 팀원분들은 모두 싱가포르에 계셨고, 업무도 전부 서울을 넘어 Asia-Pacific (APAC) 지역과 관련한 내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막상 입사한 후로 오피스에 나갈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자율적으로 근무할 수 있어서 장점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인턴 한 명 한 명한테까지 주인의식(Ownership)을 강조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이끌어가도록 격려하는 문화가 크게 자리 잡혀 있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상사한테 결재받고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눈치 볼 일이 없어 좋았다. 조직문화 직무 특성상 현재 근무하시는 분들의 만족도가 어떻게 되는지 알기 위해 인터뷰를 하거나 이미 인터뷰한 내용을 번역하는 일도 꽤 있었는데, 그때도 수평적인 업무환경 덕에 여러 팀에 속해계신 다양한 분들께 비교적 부담 없이 접근했던 것 같다. 또한 인력 충원이 필요한 팀들에 한해 채용 관련 홍보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브랜드 가이드라인에 따라 SNS 마케팅 메시지를 작성하고 포토샵 작업하는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어 좋았다.
마케팅도, 조직문화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심리상담센터에서 일했을 때나 현재 대학교에서 학생들과 일할 때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회사에서의 일은 말 그대로
What I Do(내가 하는 일)로 여겨졌다면
학교에서 일하는 경험은
Who I Am(내가 어떤 사람인지)을 많이 담아내고, 생각해 보게 하는 듯하다.
사회가 규정한 '괜찮은 삶'이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잘 해내면서 자아실현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것은 굉장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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