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퍼지는소리는조심스럽게은밀하고규칙이없었다. 전혀 사무적이지않았고 사적이고 자발적이었다. 집중해들어보면경쾌한설렘도담겨있었다. 무언가를찾고한번더확인하며기대로가득찬누구도막을수없는소리였다.
소리는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연휴를앞둔사람들이그들의계획을확인하는키보드소리였다.연휴가 다가오면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메모를 하며 여행지를 알아보곤 했다. 하지만 막상 연휴가 임박하면 이도 저도 결정하지 못했다. 이번 연휴도 마찬가지였다.아무 계획이 없었다. 매일아침잠에서깨어나는순간부터일상을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멍석을 깔아주니 아무것도 못하는 나였다. 허무하고 무기력하다는생각이들었다. 혹시나하는마음으로다음날제주로떠나는비행기표를검색했지만당연히표는없었다.
예정 없이 갑자기 떠나는 이가 있다면, 준비를 해 놓고도 떠나지 못하는 이가 있을 터. 퇴근 무렵 왕복표가 나왔다. 어떤 사정으로 취소가 되었는지 모를 표를 선택하고 결재를 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좀 짜릿한 일이다. 운이 좋았을 뿐인데 마음이 들떴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감흥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현실 앞에는 가야 할 곳, 해야 할 것, 자야 할 곳 같은 여행을 위해 선택해야 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출발이 다음날인 데다 연휴여서 숙소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막막함과 귀찮음이 몰려왔다. 한숨이 나왔다. 포기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반 잔으로는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남아 있는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그제야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배낭을 멘 체 제주 공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몰랐던 갈증에 커다란 잔에 담긴 차가운 커피를 마셨고 이제는 다른 여행객들처럼 서둘러 어딘가로 가야 했다. 그러나 갈 곳 잃은 눈만이 허둥대며 이곳저곳을 헤맸다. 공항 밖으로 커다랗게 '서귀포'라고 쓰여 있는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배낭을 들썩이며 버스를 향해 뛰었다. 꼼꼼히 생각하고 고민해 빼곡하게 일정이 짜여 있어 단 일분도 허비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서귀포요!”
검은 선글라스를 쓴 버스 기사가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서귀포라고 했던 이유는 없었다. 서귀포로 가는 버스여서 서귀포라고 했을 뿐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좌석에 적힌 버스 노선표가 보였다. '월평마을'. 몇 년 전 보았던 반짝이던 중문 바다가 생각났다. 월평에서 걷기 시작하면 중문을 지나 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 휴대폰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연습생'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노래 속 연습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나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버스가 제주시내를 벗어나자 바다와 오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새벽부터 서둘렀던 몸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잠이몰려왔다.
월평마을에서 내린 사람은 나뿐이었다. 배가 고팠다. 생각해 보니 새벽부터 일어나 먹었던 것은 커피 한잔이 전부였다. 혼밥은 어색하지 않지만일인 메뉴가 없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단체 환영’이라고 쓰인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들이 있었지만 어느 곳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선택한 것은 편의점이었다. 동그란의자에 앉아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조촐한 식사를 마치고 길을 걸었다. 중문 바다는 기억과는 달리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모래 해변을 걸을 땐 오리걸음을 걷는 것처럼 다리가 아팠다.
하얏트 산책로 입구에서는 중문단지로 가지 않았다. 대신 주상절리 해안 길을 선택했다. 해안길은 사람 발길이 어색할 만큼 고요했다. 그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을 딛고 지나야 했다. 돌들 중에는 평평하게 보이지만 흔들리는 돌이 있었고, 불안해 보여도 든든히발을받쳐주는돌이있었다. 흔들리는돌을밟았을땐양팔을휘저으며넘어지지않으려고애썼다. 시간이지날수록 힘이 들었다.그러나 해변길을피해돌아갈길은 없었다. 주변에사람도보이지않았다. 더이상걸을수없는상황이된다고해도나를도와줄사람은없었다. 힘들어도남아있는길을걸어야했다. 해변에흩어져있는돌들을보았다. 길 끝까지가기위해서는수많은돌들중하나를선택하며 걸어야 했다. 그것은당장 해야 할 내앞에놓인현실이었다.
대평리는 여전했다. 한적함, 고요함, 박수기정, 등대위그녀, 멀리 희미하게보이는형제섬과산방산.나는 하나하나씩 돌을 밟고 대평리에 도착했다. 포구를보며느끼는안도감과행복감은내마음으로결정한선택의결과였다. 대평리를떠나며나는또다시선택했다. 어딘가에숙소를정하고, 어느식당에서저녁을먹었다. 숙소가좋은지나쁜지, 요금이비싼지 저렴한지,음식이맛있는지 아닌지 염려하지않았다. 내가선택했기에그거면되었다.
다음날 화순 금모래 해변을 걸었다. 산방산 둘레길도 걸었다. 사계리 어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고 형제섬을 보며 사계 해안을 걸었다. 송악산 둘레길을 걸을 때는 힘이 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섯알오름에서는길동무를 만났다. 차멀미가 심해 어려서부터 어디든 걸어 다닌 탓에 걸음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와 위령탑에서 묵념을 했다. 모슬포에서 서귀포로 갈 때는 급행 버스를 타지 않았다. 대신 좁은 길을 따라 여러 마을을 지나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작은 정류장들을 지나며 사람들을 태웠다. 커다라 짐을 든 등이 굽은 노인, 한껏 멋을 낸 학생, 남매처럼 보이는 아이들, 다부진 모습의 청년, 중년 부부, 검게 얼굴이 그을린 여행자. 그들 모두는 선택과 선택이 이어져 버스에 몸을 실은 사람들이었다. 버스는 그들을 싣고 정류장들을 지나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또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에 올랐다.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낳는다. 여행을 떠나기로했다면 가야 할 곳, 해야 할 것, 깨끗하고 값싼 숙소와 맛있는 식당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한다. 처음 가는 곳이든 익숙한 곳이든 선택을 위해 가늠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여행의 기대치는 높아진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럴 수 없었다. 무력한 일상에 저항하듯 떠나겠다고 했지만 불확실이 사실이 되어 여행이 결정되었을 때 후회만 가득한 여행이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올수록 무엇을 위해 떠나는지 알 수 없었다.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결국출발했고허둥지둥버스를탔고과거를기억해목적지를정했다. 그리고 알았다. 최선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선택을믿는 것이라는 것을.서귀포로가는차안에서듣던어느연습생의노래처럼.
선택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결과를 알 수 없다. 모든 선택의 결과가 잘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내가 여행을 선택하고 가야 할 곳을 선택하고 길 끝에 도착하기 위해 수많은 돌을 선택했던 것처럼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선택의 근원은 자신이다. 선택은 선택과 이어지고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선택과 이어진다. 그러므로 선택의 결과가 좋지 못해도 자책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의 익숙함, 지식, 경험이 적다고 하여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결과에 대한 평가는 나의 사정을 모르는 타인의 시선일 뿐. 선택의 순간에는 선택을 하는 자신의 마음이 최선이다. 선택은 내 마음의 크기와 의지만큼 결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버스는 서귀포를 향해 달렸다.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저마다 품고 있는 마음의 크기만큼 선택한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내렸다. 그들은 또 다른 선택을 위해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나 또한 선택을 위해 버스에 몸을 실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어폰에서 연습생 노래가 나왔다. 세상은 냉정할 테지만 내가 선택했기에 날 믿어야 한다고 노래한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그 결심은 나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