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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Jun 16. 2019

선택하지 않은 여행을 선택했다

선택의 순간에는 현재의 내 마음이 최선이다.

사무실에 퍼지는 소리는 조심스럽게 은밀 규칙이 없었다. 전혀 사무적이지 고 사적이고 자발적이었다. 집중해 들어보면 경쾌한 설렘도 담겨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한번  확인하 기대로 가득  누구도 막을  없는 소리.


소리는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연휴를 앞둔 사람들이 그들 계획을 확인하는 키보드 소리였다. 연휴가 다가오면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메모를 하며 여행지를 알아보곤 했다. 하지만 막상 연휴가 임박하면 이도 저도 결정하지 못했다. 이번 연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계획이 없었다.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일상을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멍석을 깔아주니 아무것도 못하는 나였다. 허무하고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음날 제주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검색했 당연히 표는 없었다.


예정 없이 갑자기 떠나는 이가 있다면, 준비를 해 놓고도 떠나지 못하는 이가 있을 터. 퇴근 무렵 왕복표가 나왔다. 어떤 사정으로 취소가 되었는지 모를 표를 선택하고 결재를 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 운이 좋았을 뿐인데 마음이 들떴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감흥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현실 앞에는 가야 할 곳, 해야 할 것, 자야 할 곳 같은 여행을 위해 선택해야 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출발이 다음날인 데다 연휴여서 숙소 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막막함과 귀찮음이 몰려왔다. 한숨이 나왔다. 포기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빛이 반짝이며 진동 벨이 부르르 떨었다. 몽글몽글한 얼음이 가득한 커피를 받아  나는 있는 힘껏 빨대를 빨았다. 단숨에 반이 사라진 커피 냉기에 입천장이 얼얼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목이 말랐다는 것을   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일은 신나는 일이다. 동트기  감도는 차가운 공기와 해가 떠오르며 쏟아지는 햇살은 여행의 기대를 한껏 고조시킨다. 짙은 안개가 끼거나 정말인지  정비 문제로 비행기가 연착된다 해도 떠날 수만 있다면 즐겁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아니었다. 동트기  길을 나섰지만 차가운 공기의 산뜻함도 여명의 눈부심도 느낄  없었다. 건공 중에 놓인 음뿐이었다.


커피 반 잔으로는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남아 있는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그제야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배낭을 멘 체 제주 공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몰랐던 갈증에 커다란 잔에 담긴 차가운 커피를 마셨고 이제는 다른 여행객들처럼 서둘러 어딘가로 가야 했다. 그러나 갈 곳 잃은 눈만이 허둥대며 이곳저곳을 헤맸다. 공항 밖으로 커다랗게 '서귀포'라고 쓰여 있는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배낭을 들썩이며 버스를 향해 뛰었다. 꼼꼼히 생각하고 고민해 빼곡하게 일정이 짜여 있어 단 일분도 허비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서귀포요!”

검은 선글라스를 쓴 버스 기사가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서귀포라고 했던 이유는 없었다. 서귀포로 가는 버스여서 서귀포라고 했을 뿐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좌석에 적힌 버스 노선표가 보였다. '월평마을'. 몇 년 전 보았던 반짝이 중문 바다가 생각났다. 월평에서 걷기 시작하면 중문을 지나 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 휴대폰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연습생'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노래 속 연습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나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버스가 제주시내를 벗어나자 바다와 오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새벽부터 서둘렀던 몸이 느슨해지기 시작했. 잠이 몰려왔다.


월평마을에서 내린 사람은 나뿐이었다. 배가 고팠다. 생각해 보니 새벽부터 일어나 먹었던 것은 커피 한잔이 전부였다. 혼밥은 어색하지 않지만 인 메뉴가 없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단체 환영’이라고 쓰인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들이 있었지만 어느 곳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선택한 것은 편의점이었다. 동그 의자에 앉아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조촐한 식사를 마치고 길을 걸었다. 중문 바다는 기억과는 달리 예전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모래 해변을 걸을 땐 오리걸음을 걷는 것처럼 다리가 아팠다.


하얏트 산책로 입구에서는 중문단지로 가지 않았다. 대신 주상절리 해안 길을 선택했다. 해안길은 사람 발길이 어색할 만큼 고요했다. 그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을 딛고 지나야 했다. 돌들 중에는 평평하게 보이지만 흔들리는 돌이 있었고, 불안해 보여도 든든히 발을 받쳐주는 돌이 있었다. 흔들리는 돌을 밟았을  양팔을 휘저으며 넘어지지 않으려 . 시간이 지날수록 힘 들었다. 그러나 해변길을 피해 돌아갈 없었다. 주변에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 걸을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힘들어도 남아 있는 길을 걸어야 했다. 해변 흩어져 있는 돌들을 보았다.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많은 돌들  하나 선택하며 걸어야 했다. 그것은 장 해야 할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대평리는 여전했다. 한적함, 고요함, 박수기정, 등대  그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형제섬과 산방산. 는 하나하나씩 돌을 밟고 대평리에 도착했다. 포구 보며 느끼는 안도감과 행복감은  마음으로 결정한 선택의 결과였다. 대평리를 떠나며 나는  선택했다. 어딘가에 숙소를 정하고,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숙소가 좋은지 나쁜지, 요금이 비싼 저렴한지, 음식이 맛있는지 아닌지 염려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했기에 그거면 었다.


다음날 화순 금모래 해변을 걸었다. 산방산 둘레길도 걸었다. 사계리 어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고 형제섬을 보며 사계 해안을 걸었다. 송악산 둘레길을 걸을 때는 힘이 들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섯알오름에서 동무를 만났다. 차멀미가 심해 어려서부터 어디든 걸어 다닌 탓에 걸음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와 위령탑에서 묵념을 했다. 모슬포에서 서귀포로 갈 때는 급행 버스를 타지 않았다. 대신 좁은 길을 따라 여러 마을을 지나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작은 정류장들을 지나며 사람들을 태웠다. 커다라 짐을 든 등이 굽은 노인, 한껏 멋을 낸 학생, 남매처럼 보이는 아이들, 다부진 모습의 청년, 중년 부부, 얼굴이 그을린 여행자. 그들 모두는 선택과 선택이 이어져 버스에 몸을 실은 사람들이었다. 버스는 그들을 싣고 정류장들을 지나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또 다른 선택을  사람들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에 올랐다.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낳는다.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면 가야 할 곳, 해야 할 것, 깨끗하고 값싼 숙소와 맛있는 식당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한다. 처음 가는 곳이든 익숙한 곳이든 선택을 위해 가늠하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여행의 기대치는 높아진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그럴 수 없었다. 무력한 일상에 저항하듯 떠나겠다고 했지만 불확실이 사실이 되어 여행이 결정되었을 때 후회만 가득한 여행이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올수록 무엇을 위해 떠나는지 알 수 없었다. 포기할까도 생각했. 그러나 결국 출발했고 허둥지둥 버스를 탔고 과거를 기억해 목적지를 정했다. 리고 알았다. 선으로 가 할 수 있는 나의 선택을 믿는 것라는 것을. 서귀포로 가는  안에서 듣던 어느 연습생의 노래처럼.


선택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결과를 알 수 없다. 모든 선택의 결과가 잘 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내가 여행을 선택하고 가야 할 곳을 선택하고 길 끝에 도착하기 위해 수많은 돌을 선택했던 것처럼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선택의 근원은 자신이다. 선택은 선택과 이어지고 전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선택과 이어진다. 그러므로 선택의 결과가 좋지 못해도 자책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의 익숙함, 지식, 경험이 적다고 하여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결과에 대한 평가는 나의 사정을 모르는  타인의 시선일 뿐. 선택의 순간에는 선택을 하는 자신의 마음이 최선이다. 선택은 내 마음의 크기와 의지만큼 결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버스는 서귀포를 향해 달렸다.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저마다 품고 있는 마음의 크기만큼 선택한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내렸다. 그들은 또 다른 선택을 위해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나 또한 선택을 위해 버스에 몸을 실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어폰에서 연습생 노래가 나왔다. 세상은 냉정할 테지만 내가 선택했기에 날 믿어야 한다고 노래한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그 결심은 나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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