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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May 27. 2023

그곳을 떠날 땐 언제쯤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다

빈번하면 소중함이 무너질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있다. 근처에 있다 보니 자주 가볼 만도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은 늘 그곳을 생각한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유년의 흔적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란다.


기억이란 참 묘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엷게 희석될 만도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농도가 깊어져 그리움이 되니 말이다. 내 어린 시절 기억도 마찬가지다. 기억한다는 것은 특별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장면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 시절의 하늘과 공기. 집과 학교를 오가며 보았던 벌판. 학교 담장을 따라 일렬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 비포장 도로. 버스 뒤로 피어오르던 뽀얀 먼지. 집 앞 제재소에 쌓여 있는 나무들. 그 나무들 위에서 친구들과 놀던 기억 같은 것들이다.


때로는 기억 속 장면들이 꿈에 나타날 때가 있다. 꿈에서 깨고 나면 너무 애틋해 그곳에 가볼까 하지만 결국은 가지 못한다. 실망할 것 같아서다. 그곳에 간다면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이곳저곳을 헤멜 것이다. 그리고 마음 아파할 것이다. 밤이면 온 동네에 소리가 퍼지도록 슬프게 우는 소쩍새를 보겠다며 오르던 동네 뒷산도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가지 않을 수는 없다. 만남은 약속된 것일 수 있지만 우연한 것일 수도 있다. 의도적이거나 결심이 서지 않아도 생각지 않게 그 순간이 다가올 때가 있다. 얼마 전 그곳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무언가에 끌려 그곳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마을은 변해있었다. 도로는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었고 집 앞 제재소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집에는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초록대문, 작은 마당, 빨간 장미 가득 핀 화단. 고추와 상주와 아욱이 심어져 있던 텃밭. 큰방, 건넌방, 반짝 거리는 마루. 그 모든 것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그러나 골목은 그대로였다. 기억 속 골목은 넓었다. 친구들이 있었고 놀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골목은 좁았다. 상상 속에 있던 커다란 골목을 작게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재잘거리며 노는 아이들의 생기는 없었다. 골목은 나이 들어가는 노인 같았다. 반갑다고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고 싶지만 다시 아이가 되어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노인. 그렇다 해도 반가웠다. 골목을 오가며 뛰놀던 아이가 어른이 된 것처럼 골목이 변해가는 것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 낯선 골목이 점점 눈에 익어갔다. 화사하게 쏟아지는 봄 볕이 골목 안에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낮 가리는 아이가 낯선 이에게 서서히 손을 내미는 것처럼 골목을 걸을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골목에서 느끼는 감정은 내 안의 무언가를 찾겠다고 떠난 낯선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과 달랐다. 골목에 오니 그동안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편안함이었다.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내 자아가 태동했던 시작점에서 느낄 수 있는 안도감.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꺼내어도 포근히 품어줄 수 있는 곳. 그래서 세상을 의식하지 않고 널브러지듯 편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가까워도 자주 오지 않았던 이유는 소중해서 그랬던 것 같다. 빈번하면 소중함이 무너질 것 같았다. 흠이 날까 두려워하다 벼르고 벼르다 참을 수 없어 꺼내보는 꽁꽁 숨겨놓은 보석처럼 아끼고 싶었다. 나에게 그곳은 참고 견디다 더는 어찌할 수 없을 때 찾아갈 곳이었다. 갈 수 없을 땐 마음의 신호를 그리움이라는 주파수에 담아 끊임없이 보냈다. 신호에 담긴 메시지는 세상 어딘가에 내가 있으니 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신호는 갈망이었고 희망이었으며 아름다운 기억으로 영원히 남아 있기를 원하는 바람이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누구도 같을 수 없는 나만의 추억과 감정을 갖고 있는 곳. 그날 나는 한동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땐 언제쯤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다. 돌아올 시간과 시절이 언제 일지는 나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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