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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Mar 18. 2024

낳을까? - 출산도 스펙인 세상

'경험 자산'으로서의 출산 - 나는 성숙해질 준비가 되었는가?

@lepetitrobert.blogspot.com


석가모니는 인생을 고통이라고 했다.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동안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어차피 아프고 힘든 것이 인생 디폴트 값이라면 ‘남들 하는 건 다 해볼까?’라는 관점에서 출산을 고민해 본다. 게다가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으로 글 한 편이 뚝딱 나왔으니 (지난 글 <주삿바늘도 두려운 내가 어떻게 출산을>)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도 같고.


무엇보다 나는 늘 경험에 목말랐다. 성실한 학생이다가 무난히 대학을 갔고, 이후 금방 취업을 했다. 이어서 적령기라 불리는 나이에 결혼을 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여러 부침들이 있었지만 겉보기엔 이만하면 그럭저럭 대한민국 평균치의 삶이 아닌가. 그러나 내겐 배낭 하나 둘러메고 오지를 탐험한 경험이라든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모험담 같은 건 없다. 그래서 내 안엔 늘 특별한 경험에 대한 욕망이 자리해 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한 회사 선배들의 얼굴에서 어딘가 인상이 묘하게 달라졌던 것이 기억난다.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아기 낳아봐, 세상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져.”
"아이가 없을 때의 삶은 전생 같아."
 “아기를 낳으니까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아.”
"아직 넌 아이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변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아기를 갖는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저렇게까지 말할까 궁금했었다. 스펙(spec)은  취업을 위해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자격증이나 경력 등을  일컫는다. 인생 중반부의 어떤 전환점을 위해 반드시 경험해봐야 하는 일이 부모 됨이라면 임신, 출산, 육아도 하나의 스펙이 아닐까?


실제로 부모가 된 이후 직업적으로 큰 도약을 이루는 사람들도 많다. 출산을 계기로 창업을 하거나 책을 펴내기도 하고 혹은 육아 인플루언서가 되기도 한다.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다면 내 인생에 가장 엄청난 일은 바로 그것이 될 것이다. 늘 바라왔던 무언가 인생의 한 획을 크게 긋는 사건 말이다. 게다가 난 엄마가 되기를 별로 바란 적이 없던 사람이니 반전까지 더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아기가 수단도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단순히 경험해 보자고 낳기엔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아직도 우리 엄마는 출가한 딸이 먹을 반찬을 요리하고, 내 걱정을 쉬지 않고 한다. 엄마의 육아는 30년째 가늘게 이어지고 있다. 사춘기 때 내가 속을 엄청나게 썩였던 걸 떠올리면 출산과 육아라는 경험은 아주 매운맛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작년 가을 한 네이버 카페에서 “자식 낳지 마세요"라는 글이 화제가 되었다. 댓글이 900개가 넘어가며 포털 뉴스에까지 등판했다. ‘아이 권하는 사회'에서 어디에서나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던 사연들이 주를 이뤘는데, 사춘기부터 성인이 되어서 자리 잡지 못한 자식을 둔 부모들의 댓글이 많았다.


네이버 카페 레몬테라스에서 화제가 된 '자식 낳지 마세요' 글


고마워할 줄 모른다
성인 자식 수발에 아직도 힘들다
지난 시간 나를 잃어버린 것 같다
돌아가면 낳지 않겠다
어렸을 때 예쁜 건 잠깐이다
사람 하나 제구실 하게 만드는 게 정말 힘들다


“아 그래 낳지 말아야겠다!”라고 오뚝이 같은 마음이 다시 한쪽으로 기우는 순간, 그 하소연의 장에서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


"자식은 낳아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자식에게 무언가 바라면 안 되지요.
내가 좋자고 낳은 거니까요.
다만,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주어졌음에 감사해야지요"




요가 선생님께서 해주신 얘긴데, 부모와 자식은 이번 생에 서로에게 배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만나진 인연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가장 많은 사랑은 물론 가장 많은 고통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 배워야만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원가족과의 관계에서 겪은 여러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그때의 감정선을 떠올리면 아이 없이 싱거운 듯 심플한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감정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는 배움을 영영 놓치는 것이 괜찮을 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인생에서 부모가 되기로 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자식으로만 남기로 할 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나는 성숙해질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되돌아본다. 모험담처럼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겉으로는 무탈한 듯 보이는 내게도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때가 있었다. 꼭 10년 전, 가정 문제와 섭식장애, 이별, 그리고 취업 준비까지 한데 얽혀 참 힘든 스물세 살을 보냈다. 그때의 아픔은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 상처로 남아있다. 경험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일이라 여기면서도, 그 시간을 통해서만 배운 것이 있음을 이제는 안다.


세상에 한 인간 개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경험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임에 분명하다. 모든 경험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것처럼, 출산과 육아에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기쁨과 힘듦이 함께할 것이다. 아마 잔잔했던 인생 그래프의 진폭은 미친 듯이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보다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진화하는 나를 떠올려보면 썩 나쁘지 않다. 심지어 조금은 설레기도 한다.


나는 과연 성숙해질 준비가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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