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짜 사랑이 있다면
작년 10월, 이효리가 정재형의 유튜브 <요정식탁>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다.
내 진짜 꿈은 진짜로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나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진짜 사랑한 적이 있나? 아니면 나 자신조차도 진짜 사랑한 적이 있나?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진짜 사랑하는 거, 인간을 진짜 사랑하는 거... 내 필요에 의해서 뭐 이런 거 말고, 의지하는 거 말고.. 모두를 진짜 사랑하는 거.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이효리의 말이 내 마음을 때렸던 이유는 최근 몇 년간 내 인생의 화두 역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한 해의 마지막 날, 친구들과 이듬해 계획을 나누며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선언했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성격이자 주는 것보단 받는 것에 익숙한 내겐 놀랄만한 변화였다.
서른 살이 되며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살면서 받아온 큰 사랑들을 새삼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늘 쌀쌀맞은 딸에게 한없이 베풀어주는 엄마의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을 넓은 마음으로 감싸주는 남편의 사랑, 내게 오랜 지지를 보내주는 친구들의 사랑까지. 그런데 받고 있는 만큼 나는 사랑을 주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들 말한다. 우리는 사랑을 배우기 위해 이 모든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사랑이 너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 지도 막막했다.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또 다른 계기는 요가 공부를 하며 '차크라(Chakra)'라는 개념을 접했던 일이다. 차크라란 쉽게 말해 우리 몸의 기, 에너지 센터다. 몇 만개의 차크라 중에서도 척수를 따라 있는 중요한 7가지 차크라가 있다. 이 중 4번째에 해당하는 아나하타 차크라(Anahata chakra)는 심장에 위치하는 차크라로, 사랑과 관련이 깊다. 열린 가슴으로 타인과 세상을 수용하고 공감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아나하타 차크라가 건강하게 활성화된 상태다.
차크라 명상을 통해 나의 아나하타 차크라가 꽉 막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육체 수련을 할 때 가장 열리지 않는 부위 역시 아나하타 차크라가 위치한 흉추다.
나는 대인관계에서 선을 긋고 일정 수준 이상 깊은 사이가 되는 것을 경계하곤 한다. 덜 주고 덜 받는, 쿨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주는 만큼 받지 못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는 내면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랑의 길, 즉 아나하타 차크라의 통로를 굳게 막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도 사랑의 실천을 경험할 기회가 생겼다. 유기견이었던 강아지 토리를 입양하게 된 것이다. 우리 집 토리는 이렇게 사랑이 부족한 내게 처음으로 주는 기쁨을 가르쳐준 존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에서 절대 배변을 하지 않는 토리를 위해 하루 4번 산책을 나간다. 내 손과 팔이 아파도 토리가 좋아하고 원하니 계속 쓰다듬어 준다. 다리가 저린 것을 참고 10kg가 넘는 토리를 안은 채 일을 하기도 한다. 나는 하나도 재미가 없지만 장난감을 던져주는 놀이도 매일 필수다. 토리에게만큼은 되도록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
토리를 보면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그리고 토리에 대한 사랑은 함께 한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깊어진다. 유기견이었던 토리가 꾸준한 훈련을 통해 의젓하게 산책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점 눈빛과 손짓만으로도 의사소통이 될 때면 기쁘다. 반려견을 키우는 일이 할 만하냐, 어렵냐라고 묻는다면 단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강아지를 사랑으로 돌보는 일이란 인생에서 한 번쯤 경험해 볼 만한 일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강아지 한 마리가 내게 이렇게 많은 변화를 주었는데 하물며 자식은 어떨까.
아이를 키우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식을 통해 진짜 사랑을 알게 되었다."
"남녀 간의 사랑이 얼마나 덧없고 가벼운 건지 깨달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죽을 수 있다."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해본 적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 자식을 낳은 것"
도저히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크기와 깊이가 느껴지는 문장이다. 아무리 토리를 자식처럼 기르고 있다지만 솔직하게 '자식'을 '토리'로 치환해도 내 얘기가 되진 않는다. 결국 반려견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아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 그런 사랑의 경험을 일 평생 못해보고 죽어도 괜찮은 걸까? 인생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하지만 아이를 통한 사랑이 진실로 '진짜 사랑'이라면 말이다.
예전 직장에서 상무님이 해주신 말이 기억난다.
아이를 낳기 전엔 정말 날카로운 사람이었어. 쌈닭처럼 맨날 일 때문에 싸웠지. 근데 말이야, 아기를 키워보니 내가 정말 미워하는 저 사람도 아기이던 시절이 있었겠구나, 부모가 잠 아껴가며 기저귀 갈아주며 길러진 소중한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됐어.
미성숙하게 태어나 자력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를 돌보는 데는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책임감과 호르몬의 작용도 있겠지만 결국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낳을까'로 기우는 나의 마음을 바라본다. 아기가 엄마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내게 보내는 사랑과 내가 아기에게 주는 전에 없던 사랑, 이 사랑이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내 아나하타 차크라도 초록초록 빛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