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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Jun 10. 2024

<낳을까, 말까> 에필로그

그래서 우리의 결론은 낳을까 말까

@zeroperzero

시작은 이랬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느 때처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꺼낸 "낳을까?"에 평소와 달리 "그럴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후의 대화는 그다지 낭만적으로 흘러가지 못했다. '근데 어떻게 키우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당신 육아휴직 쓸 수 있어?" "입주 시터를 써야 하나?" "난 우리 엄마한텐 안 맡길 거야." "어린이집 보내야 하니까 직장 근처로 이사를 갈까?" "아니, 잠깐만. 우리 일단 난임검사부터 해야 하는 것 아냐?" 마치 집을 매매하기로 결정한 직후처럼, 매물과 대출 가능 금액을 알아보고 인테리어 업체를 검색했던 그때처럼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챙겨야 할 체크리스트가 빼곡해졌다.


삼십 대 초반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 낳는 것을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남편과 연애할 때도 "만약 네가 아이 있는 삶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말했던 나다. 임신과 출산은 언제나 내가 바라지 않는 선택지일 뿐, 나도 모르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생각할 것이 산더미라는 걸 깨닫고 나서 좀 당황스러웠다.


문득 “진짜로 원한다면 어떻게든 길은 만들어진다"는 흔한 자기 계발서의 조언이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맞나? 이게 정말 내 마음의 소리인가? 자신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출산이 그렇다.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출산이고 뭐고 떠올리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비출산이라는 선택을 하고 있게 되는 것이다. 유보가 곧 어떤 결정이 되는 문제에서, 단 한 번은 이걸 곱씹어야 할 질문으로 삶에 가져오고 싶었다. 어떻게 바로 임신에 성공해 출산하더라도 이미 젊은 엄마는 못 된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그렇게 각을 잡고 고민해 보자, 하는 마음에 <낳을까 말까>가 시작됐다.




13편의 글을 쓰며

  

<낳을까> 그리고 <말까>로 교차하며 구성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정말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당시에는 49:51, 51:49의 비율로 매일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둘째, 낳을까, 말까를 동등한 비중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내게 주고 싶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단 한 번도 출산이란 선택지를 염두하고 살아온 적이 없어서, 내 모든 사고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비출산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낳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바로 술술 대답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낳아야 할 이유는 영 빈약했다.  


그렇게 매주 주제를 부여하고, 거기에 온 마음을 집중하고 싶었지만 사실 그렇지 못했다. 예를 들면 <낳을까>를 써야 하는 주엔 도저히 낳을 마음이 들지 않았고, 낳고 싶단 마음이 드는 때엔 하필 <낳지 말까>를 쓸 차례였다.  일이 힘든 날에는 내 삶도 버겁다 느껴져서 아이 생각이 쏙 들어갔고, 친구의 사랑스럽고 똘똘한 아이를 만날 때면 나도 이런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려견을 돌보다 힘에 부치던 날에는 내가 육아엔 영 부적합하다 느껴졌고, 어떤 날엔 정상 가족에서 영영 멀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 올라왔다.


"고민하는 것 보니 언젠가 낳겠네. 진짜 딩크는 고민도 안 해."라는 말을 들으면 궁금했다. 아무리 유전자 결정론이 대세라지만, 출산과 비출산의 결정도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걸까? 딩크라는 것이 마치 하나의 신념처럼 절대 바뀌어선 안 된다는 편견이 불편했다. 반면, "그렇게 머리로 고민하면 더 못 낳아. 글 쓸 시간에 하루라도 어릴 때 빨리 낳아라."는 말도 들었다. 경험과 애정에서 나온 말이란 건 알지만 고민할 자유조차 주지 않는 시선도 영 별로였다. 나는 지금 가장 생애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말이지.


하지만 대부분은 내게 "어떤 선택이든 응원한다." "정답은 없지만 넌 잘 해낼 거야."라는 따뜻한 말을 해주었다. 그때마다 내 마음속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는 걸 느꼈다. 주로 뭔가에 극단적으로 매몰되는 성향인 나에게 전혀 반대되는 두 가지를 저울질하며 고민한 시간은 내 안에 무언가를 더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예전엔 왜 아이를 낳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모두의 선택을 응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내 안에 나도 미처 몰랐던 숨은 욕망을 마주하기도 했다. 이상적인 가족에 대한 욕망, 일에 대한 애착, 사랑과 성숙에 대한 갈구와 같이 내겐 결코 없으리라 단언했던 것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결론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거나 "낳기로 결정했다"와 같은 뚜렷한 문장이면 좋겠지만, 그렇게 쓰고 싶지 않다. 다만 임신을 위한 노력을 할 계획은 지금으로선 없다. 지금, 우리는 반려견 한 마리와 함께 사는 2인분의 삶이 이대로 좋고, 더 바랄 게 없이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에서 어떤 가능성 하나를 완전히 닫아두진 않으려 한다. 처음으로 '낳을까?'라는 낯선 생각과 마주하며 놀랐던 것처럼, 내가 언제 또 어떻게 변할지, 혹은 그때까지도 미처 몰랐던 나를 마주할지 모를 일이니까. 이것이 글을 쓰면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다.


신조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나는 내 선택을 믿고 후회하지 않으려는 편이다. 어떤 문제든 고민에 많은 시간을 쓰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뒤돌아보지 않는다. 유기견 입양이나 주택 구입과 같은 중요한 선택들을 해오면서 배운 것은, 어떤 결정이든 후회하지 않도록 내가 만들어 가면 된다는 것. 아이를 낳는 것과 낳지 않는 것 모두 장단점이 있을 거다. 혹시라도 30대 후반에 호르몬의 변화가 찾아와 급히 출산을 결정하게 되더라도, 아이와 우리 가족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매일 노력할 거라는 걸 안다. 반면, 지금처럼 평생 자녀 없이 살아간다 해도 끝내주게 재밌고 사이좋은 부부로 살 자신이 있다. 엄마가 되든 아니든, 인생이라는 고통 속에서 재미를 찾으며, 사랑에 기대어 살리란 것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글을 쓰는 동안 많은 지인들이 응원과 공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대부분 아이를 낳아서 힘든 육아의 과정을 막 시작했거나, 나처럼 낳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이들이었다. 그중에서  "네가 하는 고민 참 좋은 것 같다. 나도 그런 좀 더 고민을 더 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저출산이 국가적 이슈이고 어떻게든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출산과 육아의 선택에 대한 깊은 고민의 기회를 제공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출산이라는 것이 감히 선택의 문제가 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둘만 낳아 잘 키우자!" 때처럼 시대적 분위기에 떠밀려 은근히 어떤 선택을 강요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대신 누구나 충분히 고민하고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자유롭고 기쁜 일이어야 한다.



그동안 <낳을까, 말까>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고맙습니다.


이전 16화 <시사IN> 873호에 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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