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한 날들이 간다

사소한 저항과 실버 라이닝

by HAN

가만히 바라본 하늘이 예쁘다. 구름 언저리도 바라본다. 실버 라이닝이 있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영화를 보고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이라는 표현을 알게 됐다. 감춰진 희망을 살짝 흘리듯, 구름의 가장자리에 보이는 밝은 빛. 이 표현을 검색하면 따라 나오는 문장이 있다.

Every cloud has a silverlining. 모든 구름의 뒤편은 은빛으로 빛난다.


난 사소한 기억과 아빠를 통해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다.




어릴 적 난 노을을 싫어했다. 노을이 진 후 찾아올 어둠 때문인지 슬픔을 안은듯한 노을을 보고 싶지 않았고, 노을의 붉은빛이 보이면 쫓기듯 집으로 향했었다.

그 시절 나의 용기는 노을의 붉은빛 끝자락을 잡고 혼자 놀이터에 남아 있었던 한순간이 전부였던 거 같다.

저녁이 되어 같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는데 난 그냥 거기 있었다. 아이들이 없어 웃음기 사라진 얼굴처럼 냉랭해진 놀이터에. 그날 왜 그랬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노을마저 지고 어두운데 미끄럼틀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노을에 겁먹지 않고 용감해지기로 한 아이처럼. 난 그날 어린아이가 설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뭔가 소심한 저항을 한 거 같다.


노을은 여전히 슬퍼 보이고, 이내 어둠이 올 걸 알지만 어느새 난 노을을 좋아하게 됐다. 중년의 나에게 슬픔과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했던 70일 동안 난 유난히 슬픔에 허덕였다.

'내가 너라면, 네가 나라면'을 수 이 되뇌기에 '내가 생각하는 아빠'처럼 외로웠고, '내가 생각하는 아빠'처럼 마음이 아팠다.

언제든 닥칠 이별과 죽음을 준비하며 노을의 낭만을 알게 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난 슬픔에 잠식되어 갔다.

아빠가 퇴원하기 며칠 전, 어릴 적 놀이터의 그날처럼, 난 돌아가려는 나를 멈춰 세웠다. 번엔 몸이 아니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생각과 마음을. 그날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멈추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질질 끌려가듯 다른 종류의 고통을 안고 속도를 줄여갔다. 멈춰 섬이 무엇에 대한 저항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후 난 슬픔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빠를 향해, 나를 향해 쏟아부어지는 사랑과 은빛 희망을 봤다.


돌아보면 그 시간은 제부(弟夫)와 동생이 아빠에게 선물한 보호와 사랑의 시간이었다. 생사를 오가며 웃음을 잃었던 아빠를 위해 제부와 동생은 의사로, 자식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개인적으로 제부가 생각하는 치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었고 사랑이었다.


아빠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외곽이라 창문 너머로 나무와 풀이 보이고, 다른 동생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1인실 같은 2인실에서 다정한 여사님의 간병을 받고 계신다.

퇴원을 앞두고 아빠는 심장과 폐에 물이 고여 시술을 받으셨었다. 퇴원이 가능할까 염려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으셨고, 돈으로 시간을 버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서 연명치료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었다.

요양병원에 계신 지 3주가 조금 지났는데 며칠 전, 여사님이 동영상을 보내셨다. 걷는 연습을 시작한다며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아빠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구에 의지해 서계시다가 힘이 없으셔서 점점 무릎이 접히셨는데 우린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기적을 보는 거 같았다.

아빠의 병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콧줄로 영양분을 공급받으셔서 다른 걸 드시지 못한다. 그래도 환한 병실에서 아빠를 만나고 아빠의 농담을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린 행복하다.


아빠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적지 않다. 아빠가 지금 누리는 건 동생이 큰돈을 들여 우리 모두에게 한 선물이다. 경제적으로 아무 도움이 못 되는 나에겐 더 큰 선물이기에 내가 가장 감사한지도 모른다.

아빠를 통해 알게 되는 가족과 지인들의 사랑. 어둠이 짙을수록 더 또렷한 빛.

아빠의 병은 언제든지 나빠지실 수 있고, 계속 1인 간병을 받을 수는 없다. 잠깐 누리는 행복일지라도 지금 우리의 행복한 기억은 오래오래 남아 슬픔을 대신할 거다.

난 아무 일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 일이 많아서 힘들고 울겠지만, 그 일을 통해 보이는 사랑과 감사에 행복할 거다. 슬픔에 출렁이면서도 웃고 떠들게 되는 약국식구들, 기도와 위로를 전하는 귀한 이들, 언제나 나의 배경이 되는 가족, 특별히 내 형편을 챙기는 동생이 있기에 난 잘 살아낼 거다.

그리고 훗날 그 사랑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표현할 기회가 있길, 나에게 기대한다.




슬픔은 어떤 모습일까?

한 눈은 감고 있고, 한눈은 눈물을 머금고 영롱한 빛을 발하는 모습일 거 같다. 너무 아픈 슬픔이기에 한눈은 감고, 슬픔 안에도 사랑과 희망이 있기에 빛을 발하는 모습.

다가올 슬픔에 너무 겁먹지 말고, 두려움에 사소한 저항이라도 해 보시길 권한다.

그리고 먹구름 뒤의 은빛을 발견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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