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순 구 01화

단 네 글자, 무료하게

by 리얼라이어

무료하게.


아버지의 일기는 2017년 9월 16일 토요일,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이 날에 멈췄다. 그 흔적은 단 네 글자, 무료하게. 네 글자가 전부였다. 이 날은 벌초를 하루 앞둔 날이었고, 미리 점검받은 예초기와 벌초를 위한 도구 일체 모두를 이미 며칠 전 준비를 완료했던 터였다. 매년마다 벌초 시기가 도래되면 아버지의 근심은 커져간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예초기를 구매할 때 장사꾼의 꾐에 속아 성능 대비 비싸게 사셨는데, 매년 꼭 말썽을 일으키는 예초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지신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당신께서 직접 예초기를 다루고 싶은데 연로하시니 아들에게 그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이다. 더욱이 벌초를 하기 위해서는 온 식구가 꼭두새벽부터 움직여야 해서 오가는 차 안에서 쪽잠 주무셔도 될 일을 한사코 뜬 눈으로 계신다. 나는 이때 아버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아들인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미안하고 속상함 그 자체였으리라. 그래도 아버지는 끝까지 남의 손을 빌리거나 돈으로 해결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의 자식이므로. 어쨌든 벌초를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그 날의 일기처럼 무료하게 하루를 보내셨나 보다. 내일이면 아버지 당신 인생에 벌초와 관련한 고민과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음을 모른 채 말이다.


글 © 순 구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언제나 내 곁에 계실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신지 어느덧 햇수로 3년이 되었다. 언젠가는 곁을 떠나실 것이라 생각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가 온 집안을 슬픔 속으로 내몰더니 단 한 달 만에 하릴없이 아버지는 가족 곁을 영영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0월. 2017년 가을. 눈부신 가을 햇살 한 번 마주쳐 본 추억이 없고,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이 을씨년스러웠으며, 거리마다 한들한들 거리는 코스모스를 감상하는 대신 아버지 영정 사진 곁에 놓인 하얀 국화꽃만이 기억 속에 자리한다. 이렇게 그 해 가을은 낭만의 계절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가족은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49제 탈상 전까지 일주일에 하루 가족과 함께 저녁을 같이 나누면서 아버지를 추모하기로 했다. 그 날 저녁마다 엄마는 두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 몰래 자주 입술을 꽉 깨물고 계셨는데, 이미 퉁퉁 부어오를 때로 오른 엄마의 얼굴은 저녁을 준비하기 훨씬 이전부터 수 십 차례 울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엄마의 그 모습에서 목 끝까지 뜨거움을 느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식보다 남편과 사별한 아내의 마음을 내 어찌 알겠는가! 나는 끝까지 눈물만은 흘리지 않으려고 애써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비통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오빠! 잠깐만…


그날도 아버지를 추모하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가려는 채비를 하려 할 때 여동생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평소 아버지가 서재처럼 쓰셨던 방으로 갔는데 문까지 닫는 여동생의 행동이 의아했다. 무슨 안 좋은 문제가 생긴 것일까? 긴장되었다. 잠시 후, 동생이 종류와 크기가 다른 다이어리 세 권을 나에게 내밀었다.


아빠 일기장이야.
몇 장 읽어봤는데 다 읽을까 하다가 오빠가 먼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거 알아? 굉장히 재미있어. 웃다가 엄마한테 들킬 뻔했잖아.
참, 엄마는 아직 모르셔. 어떡할까?


나는 자리에서 다이어리 세 권을 빠르게 넘겨 보았다. 날짜를 보니 2017년 한 권, 2016년 한 권 그리고 2015년 드문드문 남겨 놓은 아버지의 일기였다. 동생이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단다. 동생이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당분간 모르고 계시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마침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나가요!
내가 먼저 읽고 너 줄게.
그리고 엄마한테는 일단 비밀!


당시 엄마에게 아버지의 일기장 존재를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엄마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남편의 일기를 한 장 한 장 넘겨 볼 때마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토해낼 엄마의 모습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때가 안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엄마는 남편의 일기장 존재를 모르고 계신다. 돌이켜보니 내가 잘못했다. 때를 놓쳐도 한 참 놓쳤다. 글을 모두 완성하면 엄마께 아버지의 일기장을 드려야겠다. 엄마, 죄송해요!


아버지가 남기신 세 권의 일기장 | 사진 © 슬로우 스타터


어쨌든 그 날 저녁,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종이 가방에 넣어 아버지의 일기장 세 권을 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하루에 한 권씩 삼일 동안 출퇴근 시간을 이용하여 모두 읽었다. 그러고 보니 삼 일간 아버지와 함께 출퇴근을 한 것이다. 이때만큼은 아버지 또한 절대로 무료하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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