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오후
커피를 내린다. 일종의 의식처럼 나는 베이비 시터가 오면 원두를 꺼내어 든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면서 '이제 엄마가 아닌 나로 잠시 시간을 보내겠노라'라고 뇌에 신호를 보낸다. 달콤 쌉싸름한 커피 향이 코끝을 타고 진하게 퍼진다. 아이들이 울고 떼를 쓰는 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주방에 서서 아이들을 잠시 달랜다. 엄마를 보고 더 칭얼대는 아이들이다. "그냥 두고 들어가세요." 시터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다 내려진 커피를 들고 주방에서 사라진다.
노트북을 켠다. 이메일을 연다. 이런저런 단체에서 온 캠페인 성 이메일과 청구서들이다. 당장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 이메일은 두고 청구서만 확인한다. 집에만 있는데도 카드값은 많이도 나온다. 내역은 온통 아이들 용품. 날 위해 무엇인가를 산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데 뭘 사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고 싶은 것도 없어진다.
유튜브로 간다. 구독 중인 영어 채널에 새 강의가 올라왔다. 짧게는 10여분 길게는 1시간 남짓한 영상을 서 너개 이어 본다. 영어는 먹고살게 해주는 도구였다. 임신과 육아로 일을 못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이 나면 영어 강의 영상을 보는 이유다. 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생업전선으로 돌아갔을 때 지장이 없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오후 2시
아이들이 간식을 먹을 시간이다.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낸다. 마트에서 눈에 띄는 제철 과일을 골라 온다. 이번에는 대봉시였다. 어찌나 떫은지 집에서 일주일 가량을 숙성시켜야만 했다. 껍질을 까 아이들 그릇에 담아 둔다.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고구마도 꺼내어 놓는다. 혹시 감이 부족하면 고구마도 주라고 베이비시터에게 당부한다. 다시 서재로 들어가려는데 빨래로 가득 찬 빨래 바구니가 보인다. 남편과 나의 빨래를 세탁기에 돌린다. -오후 2시 30분
무크로 간다. 무크에는 학부 수준의 무료 강의가 수두룩하다. 한국어 강사라는 직업에 필요할만한 것을 찾아 듣는다. 역시나 언제고 일을 다시 시작할 그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사회로부터 단절된 느낌을 받지 않을 것 같다. 또 육아에 치여 퇴화하는 듯한 뇌에 자극을 주고 싶기도 하다.
컴퓨터마저 켜기 싫은 날에는 책을 펼친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기도 하고 책장에 쌓아두고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어 들기도 한다. 이곳저곳에서 추천하는 책들을 새로 구입해서 읽어 보기도 한다. 책은 현재를 벗어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책 속 세계에 빠질 수 있다. -오후 4시
엄마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이들이 낮잠에 빠져 있는 때 서재에서 슬며시 나온다. 늦은 점심 혹은 이른 저녁을 먹는다. 설거지가 귀찮아 대개는 빵과 우유로 때운다. 배를 채우고 청소를 시작한다. 거실과 주방, 각방을 닦는다. 아이들이 깬다. 아이들 방 이불을 건조기로 털고 바닥을 닦는다. 그 사이 세탁기에서 종료 알림이 울린다. 세탁이 끝난 옷들을 꺼내어 넌다.
남편 저녁이자 나의 아침을 준비한다. 밥을 하고 냉동실에서 시어머니가 보낸 국거리를 꺼내어 끓인다. 양념해준 고기를 굽는다. 입에 물릴 때면 그리고 내가 기력이 남아 있는 날은 요리를 한다. 아무리 손맛이 좋아도 냉동보다는 방금 한 음식이 맛있는 거는 어쩔 수 없다. -오후 5시 30분
베이비 시터가 퇴근하기까지 30분이 남았다.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는다. 에너지를 채운다. 저녁 육아를 할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아이들 저녁까지 다 먹이고 베이비 시터가 퇴근한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그녀에게 매일같이 건넨다. -오후 6시
아이들과 다시 놀이를 한다. 매일 똑같은 장난감과 장소에 아이들이 질려한다. 잠시 한 눈을 팔면 아이들은 현관으로 나가 유모차에 셀프 탑승을 하기도 하고 안마 의자에 올라가 있다. 눈이 마주치면 엄마가 뭐라고 할 걸 아는지 애교 섞인 눈웃음을 날린다. 혼내지 못하고 아이들 앞에 바싹 다가가 앉는다. 혹시라도 미끄러지면 받아줄 준비를 한다. -오후 6시 30분
남편이 왔다.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아이들을 한 명씩 씻긴다. 일어서는 게 가능해지고 아이들은 욕조에서 가만있지를 않는다. 한 번에 한 아이만 통제가 가능하다. 먼저 씻은 아이를 내게 넘겨준다. 아이에게 크림을 발라주고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힌다. 당연히 아이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벗은 몸으로 이리저리 기어 다닌다. 쫓아다니며 바르고 채우고 입힌다. 이 쉬운 과정에도 진땀이 난다. 그걸 두 번씩 해야 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오후 7시
남편은 아이들이 가지고 논 장난감을 닦는다. 나는 아이들을 본다. 아이들이 포스터에 붙은 동물과 과일 등을 가리키면 답을 해준다. 거꾸로 내가 질문을 하기도 한다. "사과 어디 있어?" 아이가 맞는 그림을 고를 때면 꽤 뿌듯하다. 남편이 저녁을 먹고 치운다. 나는 아이들을 본다. 까꿍 놀이도 하고 노래도 불러준다. -오후 7시 30분
아이들이 잠들기 전 먹는 마지막 음식은 요거트다. 남편과 내가 한 명씩 맡아 요거트를 먹인다. 우유는 잘 먹지 않는데 요거트와 치즈는 정말 좋아한다.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꼬물꼬물 아가들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는 게 감격스러워 지기까지 한다. "잘 먹고 무럭무럭 크렴" 이야기한다.
치카치카를 하자고 한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아이들에게 준다. 달콤한 치약을 쪽쪽 빨아먹는다. 다 빨아먹었는지 칫솔을 던진다. 그때 내가 아이를 잡고 이를 닦인다. 아이는 온 동네가 떠나가게 울어 재낀다.
-오후 8시
집 안의 불을 다 끈다. 아이들에게 쪽쪽이를 물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남편과 내가 매트의 끝에 각각 눕는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를 오가며 뒹군다. 조금 아이들과 놀아주다가 자장가를 부른다. 그래도 잠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잠든 척 조용히 누워 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이내 잠이 든다. -오후 8시 30분
남편은 집안일을 한다. 분리수거를 하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만의 시간을 갖는다. 소파에 누워 유튜브 영상을 본다. 그 사이 건조기에서 알람이 울리고 아이들 옷을 꺼내어 갠다.
같은 시간 나는 운동을 한다. 안방에 요가 매트를 깔고 유튜브에서 홈트 영상을 고른다. 몸이 찌뿌둥한 날에는 스트레칭을, 몸이 무거운 날에는 근력 유산소를,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요가 영상을 틀어놓고 따라 한다.
-오후 9시 30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다. 10시가 넘었지만 자고 싶지는 않다. 넷플릭스를 연다. 출산 후 정기결제를 끊었다가 '오징어 게임'을 보고 싶어 다시 결제를 시작했다. 이런저런 미드를 본다. 졸리다. 아이의 '잉'소리에 눈을 떠보면 오후 11시 30분. 넷플릭스는 계속 켜 있다. 잠결에 아이 방으로 달려가 토닥여 주고 나온다. 다시 영상을 돌려 앞으로 간다. 또 졸리다. 휴대폰을 던지고 잠이 든다. 오늘 밤은 아이가 더 이상 안 깼으면 좋겠다. -오전 1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