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단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지쳤을 때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고, 어쩐지 움츠러들고 힘이 빠질 때 다시 기운을 내도록 아늑한 안식처가 되어 주는 책이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에서> 등의 소설을 통하여 인생과 인간성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책 <삶을 견디는 기쁨>에서는 글과 시, 그림이 어우러져, 자신의 속내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헤르만 헤세를 만날 수 있다. 자연과 일상에서의 소소한 경험에서 이어지는 내면세계에 대한 탐색이 유려한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어떤 페이지든 열어 짧은 글과 그림, 그리고 여러 단상들을 모아주는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한결 정화된다.
절대 잊지 말라
저녁이 따스하게 감싸 주지 않는
힘겹고, 뜨겁기만 한 낮은 없다.
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웠던 날도
어머니 같은 밤이 감싸 안아 주리라.
오 가슴이여, 그대 스스로를 위로하라.
그리움을 견디기 어려워도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너를 감싸 줄
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리니,
쉴 새 없이 헤매던 방랑객에게
그것은 침대요, 관이 되리라.
낯선 손길이 마련해 준
그 안에서 그대는 마침내 쉬게 되리니.
흥분한 가슴이여 잊지 말라.
그 어떤 기쁨도 진정으로 사랑하라.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 전에
아픈 통증까지도 사랑하라.
저녁이 따스하게 감싸 주지 않는
힘겹고, 뜨겁기만 한 낮은 없다.
무자비하고 사납고 소란스러웠던 날도
어머니 같은 밤이 감싸 안아 주리라.
또한 슬픔과 고통, 고독과 외로움, 두려움, 좌절과 절망, 죽음 등 삶에 닥치는 역경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궁핍하고 고통스러운 시기만이 진정한 우리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충실하게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볼 줄 알며, 정신적인 아픔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취약점을 감싸 주는 것은 참담한 고요 속에서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라.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시작이 있으면 최상의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다시 밝은 빛을 보고자 한다면 슬픔과 절망을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
" 슬픔이 절정에 달하면 상황이 호전된다."
" 정신착란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삶에 대한 것이거나 우리의 성장과 본능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 하고, 의식하려고 노력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 그 괴리를 좁힐 수는 없지만, 그 사이를 뛰어넘는 것은 수백 번도 가능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용기가 필요하며 뛰어넘기 전에는 공포가 우리를 엄습한다. 미리부터 마음속의 동요를 억누르거나 '미친 짓'이라는 등의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오히려 그 동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 모든 성장은 그러한 상태와 결부되어 있으며 고난과 고통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나는 영웅주의나 스토아 철학에 대해 반대하는, 아니 불신하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의 삶에서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 어머니의 죽음이 그런 경우였는데, 그 당시 나는 한동안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고통의 시계를 가장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고수해 왔다. 다시 말해 나는 고통과 그보다 높은 힘에 나 자신을 내맡겼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그와 같은 힘에 맡겼다."
특히 시간과 경험, 집필 과정에서의 고민과 대중의 반응에 대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의식을 철저하게 탐구한 과정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어 그 심리분석 과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나 자신의 심리를 되짚어 보는 통로를 마련할 수 있다. 몇 대목만을 인용하겠지만, 직접 읽고 체험하며 느끼는 과정이 훨씬 의미 있고, 그 자체로 치유적이다.
"일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몰이나 일출이라는 것이 존재하려면 먼저 위와 아래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지구에 위와 아래는 없으며, 그것은 착각의 근원지인 의간의 뇌 속에나 존재할 따름이다. 서로 반대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
죽음이 결코 파괴시키지 못하는
너의 가장 내면적인 자아는
오직 네게만 속한 것이며
명성에 귀 기울이는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받아들일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며 고맙게 받아 마실 줄 모르는 것은 모두 독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고대 중국의 고전에서 말하는 '현자'나 '완성된 자'란, 인도 철학이나 소크라테스 철학에서의 '선한 인간'과 똑같은 유형이다. 그런 인간이 지니고 있는 힘은 그가 누군가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에 있지 않고, 반대로 죽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에 있다."
마지막으로 책 후반부에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어딘가에
인생의 사막에서 나는 정처 없이 방황하며
무거운 짐에 겨워 신음한다.
그러나 거의 잊어버렸지만 어딘가에
시원하게 그늘지고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러나 아득히 먼 꿈속 어딘가에
영원한 안식처가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곳에서 영혼은 다시 고향을 찾고
영원한 잠, 밤 그리고 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헤르만 헤세 저. 유혜자 옮김. 2014. 삶을 견디는 기쁨. 문예춘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