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도 괜찮아."라는 가르침에 대하여
‘90년대 중반의 어느 맑은 날, 축구 커리어의 첫 골을 기록했다. 축구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공놀이였지만, 내 발을 떠난 공이 골라인을 넘어서는 순간에 느꼈던 희열과, 골키퍼였던 이름 모를 친구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축구는 약 20여 년의 시간 동안 나를 정의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매김해왔다.
운 좋게 큰 부상 없이 축구실력을 길러왔고, 대부분의 축구 커뮤니티에서 환영받는 수준의 축구를 구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 직후 그렇게 좋아하던 축구를 즐기다 발목이 탈구되는 경험을 했다. 전신마취수술과 몇 개월간의 재활, 택시 출퇴근을 경험하며 가족을 위해서라도 이 위험한 운동을 그만둬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축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여러 스포츠를 경험하던 중, 아내의 권유로 김포 운양동에 위치한 누아요가에 다니게 되었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2024년, 큰 변수가 없는 한 매주 일요일마다 요가를 수련하고 있다. 이 정도면 요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겠으나, 적어도 요가가 내 삶에 자리 잡았다고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지난 1년의 요가에 대한 회고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요가의 모든 면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글을 접하시는 분들께 요가의 본질을 전해 드리는 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 다만, 요가를 삶에 들이기를 주저하시는 분들, 특히 남성분들께 도움을 드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난 1년간 누아요가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몇 가지 장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요가를 시작한 과정을 단 한 문장으로 축소했지만, 사실 아내가 나를 요가원으로 이끄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쉽게 요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는 요가는 축구, 다시 말해 스포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나는 왜 축구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한 적이 있다.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본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내린 결론은 정해진 규칙 내에서 잘 훈련된 육체적 능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희열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감정적 기반은 가령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주름잡는 유명 축구선수들의 경기력을 동경하며 더욱 공고하게 자리 잡았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러한 자극적인 감정에 젖어있던 와중에, 그 빈자리를 요가라는 정적인 운동으로 대체하려고 했으니 아무래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사실 요가는 운동이라 보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정신적/육체적 활동이다.
요가원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접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못해도 괜찮다."이다. 이 가르침을 두고 "오늘도 내일도 못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일단 요가 수련이 생활 속에서 반복된다는 전제 하에, 신체가 허락되고 부상을 피하는 범위 내에서 나 자신의 흐름에 맞게 수련을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무한경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경쟁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무한경쟁 시대에서는 일반적으로 획일화된 지표를 설정해 두고, 그 지표가 높은 사람은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완전에 가깝게 발전해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곤 한다. 따라서 한 집단에서 성과가 더딘 사람에게 "성과가 더뎌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못해, 말하는 이의 의도를 의심해 봐야 할 정도의 사건일 것이다.
그래서 요가원의 풍경은 매우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같은 아사나(동작)를 수련하지만, 중간중간 낙오자가 생긴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낙오의 패배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의 표정에 변화가 없음은 물론이고, 호흡은 비교적 규칙적으로 유지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의 요가를 지속한다. 읽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낙오'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충분한 설명을 마쳤으니 '낙오'는 "각자의 방식으로 요가를 수련하는 중"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으로 정정하고자 한다.
내가 정기적으로 듣는 수업이 숙련반이라서 때로는 고서에서나 볼 법한 아사나를 목격한다. 물론 지극히 내 기준에서지만. 처음에는 아무리 숙련반이라는 점을 떠올리려 해도, 워낙 경쟁사회에 익숙해져 있고, 그 안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보이는 것이 익숙했던 터라, 아사나를 쫓아가지 못할 때마다 초조함과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지난 1년간 변한 게 있다면, 지금은 오늘도 수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게 되었다. 수련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가능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수준에 도달한 분들의 노력에 감히 진심 어린 응원과 존경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요가는 내가 축구를 통해 느꼈던 희열을 줄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다. 그렇지만 축구가 아닌 무언가에서 축구의 희열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은 당분간 멈출 예정이다. 왜냐하면 요가를 통해 그러한 여정의 필요성을 느끼기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골을 기록한 밤은 흥분 상태가 지속되어 쉽게 잠이 들 수 없을 만큼 축구가 주는 감정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감정이 나의 존재론적인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반면, 요가는 내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의 노력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는 점에서 요가 수련을 마치고 나면 한껏 행복해짐을 느낀다.
요가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 많은 분들이 요가의 장점을 묻곤 한다. 그렇게 말은 안 하지만, 대부분 심폐지구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근력강화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한다. 물론 그러한 면에서 요가가 아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축구 선수들의 근육의 형태가 있고, 요가를 수련한 분들의 일반적인 근육의 형태가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접근은 지나치게 스포츠 중심적인 사고에 기반한 접근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보고 싶고, 만약 이런 접근에서 여러분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스포츠를 통해 겪지 못했던 행복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