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을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
축구는 발도 발이지만 눈이 바쁜 운동이다.
먼저,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는 상대 선수들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 혹시라도 왼발을 사용하는 선수가 섞여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왼발을 사용하는 선수가 있다면, 경기 중에 왼발을 중심으로 수비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혹시라도 공을 차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선수가 있었다면, 그 선수의 왼쪽 축구화가 닳아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곤 했다. 왼발이 닳아 있다면, 그는 왼발잡이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경기가 시작되면 눈은 더욱 바빠진다. 공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당연하고, 동료들의 컨디션이 어떠한지, 상대팀 수비수가 가진 장단점은 무엇인지 등을 확인한다. 무엇을 확인해서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지 하나하나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매 순간 판단을 해서 육체적 능력이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최적의 플레이를 지속해야 한다.
이처럼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운동을 할 때에는 시선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그런 나에게 요가원의 풍경은 당황 그 자체였다.
일단 요가원은 조용하다. 요가원에 도착한 수강생들은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가벼운 눈인사 내지는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그것이 축구의 큰 소리의 대화나 파이팅 넘치는 의사소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축구처럼 상대가 무슨 발을 사용하는지, 상대의 컨디션이 어떠한지는 살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요가수업이 시작하기 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수업이 시작된 후의 풍경은 더욱 당황스럽다. 축구는 모두가 공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 운동장 위에 있는 모두가 수시로 주변을 살핀다. 그런데 요가는 다르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선생님께 꽤나 따끔하게 지적을 받는다. 특히 나처럼 아사나(동작)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수시로 주변을 살펴야 하는데, 주변을 살피는 내 모습이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걸어가는 비둘기 마냥 그렇게 소란스러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선'을 요가원에서는 '드리시티'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물론 대중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시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드리시티란 '한 점을 응시한다.'는 뜻으로, 수업 중에 "드리시티를 의식하세요.", "드리시티가 무너지지 않게 신경 쓰세요." 등으로 활용되곤 한다.
선생님은 드리시티를 챙겨야 하는 이유를 '내 몸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전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드리시티는 '점'을 응시하는 것이다. 점은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점을 보면서 우리는 특별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특별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 몸의 작은 변화까지도 느낄만한 여력을 확보한다는 가르침이다.
사실 초심자인 내 입장에서는 점을 응시하기가 어려웠다. 점을 응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잡념이 머리에 자리한다. 보통은 이런 식이다. 지금 하는 동작을 기억하기 위해 아내를 바라본다. → 동작을 인지한다. → 동시에 아내가 땀을 흘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아내가 더울 것이라 생각한다. → 점심메뉴 선정에 반영하리라 생각한다. → 지난주에 먹었던 무언가가 떠오른다. 이렇게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내 몸 안에 일어나는 변화는 '허리가 아프네', '허벅지가 아프네' 정도의 간단한 수준의 변화만 인지하게 되는 셈이다.
무엇이 아니라 '점'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사나가 익숙해졌고, 옆자리의 아내를 보지 않고도 조금은 아사나를 이어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무언가가 아닌 점을 바라볼 여유가 생기게 되었고 이전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내 몸 안의 이름 모를 근육이 각성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성격의 기쁨이라, 그런 경험을 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질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시선이동과 잡념에 노출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같은 깨달음 이후에는 쉼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오감 중 하나를 사용하지 않는 시도를 하고 있다. 가령, 눈을 감는다던가, 이어폰으로 파도소리와 같은 백색소음을 듣는다던가, 음식을 여러 번 씹으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맛에 모든 감각을 집중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위에서 말한 시도들이 일종의 명상의 기법이라고 한다.
앞서 요가 수업이 시작되기 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아직 축구만큼 나만의 루틴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가능한 버퍼링 없이 점을 응시하기 위한 나름의 행동들을 찾아가는 중이다.
축구를 하기 전에는 내 몸을 깨우기 위한 준비를 했다면, 요가를 하기 전에는 잡념에 노출되지 않기 위한 준비를 한다. 축구와는 너무 다른 준비지만, 축구가 절대 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