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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수 Sep 05. 2019

행복을 담는 유일한 그릇

고통과 거리를 두고 내게 필요한 행복을 찾는 관점의 유연성

31살에 누나는 담낭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 판정을 받고 거의 6개월 만이었다. 외지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떨어져 살았고  어릴 때 격렬하게 싸운 기억 외에는 별 흔적이 없는 누나였다. 이 세상에 누나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누나가 첫 월급날 사준 지갑 하나였다. 그 지갑을 보면 나는 억울하고 자신이 미워진다. 그래도 동생을 자랑스러워하고 명절에는 꼭 선물 하나를 사 주는 누나였는데 형제이면서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왜 따뜻하게 살지 못했을까? 느닷없이 차를 타고 가다가 누나만 생각하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존재란 이렇게 허망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지금 생각하면 목표나 일 중심으로 사는데 익숙한 나에게 성취보다 일상의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행복을 챙기도록 관점을 바꾼 것은 누나의 죽음이었다. 그 허망한 아픔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꾼 것이다. 누리지 못하고 빼앗긴 듯한 존재의 흔적과 사랑은 안타까움과 아픔만 준 것이 아니라 서서히 다른 측면을 보는 용기를 준 듯하다. 누나의 죽음이라는 아픔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내 인생의 거울이었다. 


우리의 관점은 한 가지 또는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 익숙한 것,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점점 더 고정되어 간다. 우리는 기대하는 것을 통해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관점을 잃어버린다. 목표만 바라보고 무작정 달려가면서 그 과정에서 맞보고 즐겨야 하는 흔적을 잃어버린다


옛날 세상이 힘들다고 매사에 불평만 해대는 제자를 큰스님이 불렀다. 소금을 한 줌 가져오라고 하고는 작은 잔에 잘 섞어 그 물 맛을 보게 했다. 그러고는 큰스님이 물었다. “물맛이 어떠냐?” 불평 많은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당연히 “짭니다”라고 대답했다.


 큰 스님은 다시 소금을 한 줌 가져오라고 하고는 근처 호숫가로 데리고 갔다. 소금을 호수에 넣고는 휘휘 저은 다음 호수의 물을 한 잔 떠서 마시게 했다. 큰스님이  “물맛이 어떠냐?”라고  다시 물었다. 제자는 “시원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소금 맛이 느껴지냐고 묻자 제자는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그제야 큰스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인생의 고통은 소금과 같다. 하지만 짠맛의 정도는 고통을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 작은 잔이 아니라 호수가 되거라” 고통에 대한 관점을 조금 넓히면 우리도 호수가 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주는 통증과 싸우기보다 고통에 담긴 다른 측면을  들여다볼 의지를 가질 때 

호수에 섞인 소금처럼 고통이 우리 삶을 쉽게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누릴 작은 틈을 가지고

삶의 간을 잘 맞춰나갈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유연한 관점을 가지지 못할 때 얽매인다하나의 관점에 얽매이면 다른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부정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원망하며 싸우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기회조차 잃어버린다. 


때로는 고통이나 불행, 실패는 무시하거나 흘려보내야 할 때가 있다. 하나의 관점에 얽매이면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이라도 쉽게 흘려보내거나 무시하지 못한다. 살짝 무시하고 흘려보낼 수 있을 때 시야는 좀 더 넓어지고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오늘의 불행이 긴 시간에서 보면 꼭 필요한 기회이자 전환일 수 있다는 새로운 기대를 만들기도 한다. 


세상은 쉽게 기대한 대로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불평과 불만도 생기고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내 기대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지 못한 상황과 싸움만 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도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살아도 정작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실패했을 때지 않던가! 작은 그릇이 아니라 호수가 되는 방법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유연하게 것이다. 


고통과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 속에 녹아 있는 의미를 보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용기라기보다는 고통을 잠시 무시하고 다른 측면을 살피는 유연성이다. 누구나 한 번쯤의 경험은 있다. 배신이란 상황이 만들어준 새로운 만남, 상실이 주는 우연한 기회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가 만나는 역경의 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연한 기회’를 보지 못한다면 아직 ‘관점에 대한 유연한 근력’이 키워지지 않아서 일거다. 


말하기 좋은 ‘관점의 유연성’은 생각한다고 쉽게 되지 않는다. 근력을 키우듯 내 앞에 놓인 힘겨운 일상의 단면을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발견하는 반복된 경험에서 만들어진다.  우리의 주머니에서는 세상을 보다 의지적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안경이 있다. 그 안경을 꺼내 쓰는 힘도 우리에게 있다. 힘겨운 일상이라도 내게 필요한 안경을 쓰고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힘이 누구에게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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