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권수 Nov 04. 2019

삶의 띄어쓰기, 거리두기

삶에 대한 능동적 선택은 거리를 두리는 근력에서 나온다. 

삶의 띄어쓰기, 거리두기 기술 

11년 일 한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면서 가장 후회했던 것은 '왜 그리 아등바등 최선을 다했을까'였다. 사실 많은 것을 해내고 혜택도 많았지만 조직에서 벗어나 나를 보니 먹고 산 것 외에는 챙길 게 없었다. 너무 심한 평가인가? 하지만 나의 의미보다는 조직과 일의 의미로만 지나치게 살았다는 반성은 사실이다. 조직의 일과 나와의 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 퇴직 후 반성의 핵심은 '거리두기의 실패'였다. 삶은 자석처럼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데 우리는 거리두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고 그런 근력도 없다.  '거리두기'라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 것은 명상을 배우고부터다. 명상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 느낌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훈련을 반복한다. 그렇게 익숙해진 거리를 통해 덜 휘둘리고 조절하는 힘이 생긴다. 나를 좀 더 이해하는 명확한 선택이 가능해진다. 중요하거나 힘든 상황일수록 근육과 신경은 조여들어 일단 해결에 급급하다 보면 여유도 없고 선택도 모호해진다. 강할 때는 레슬링처럼 바짝 달라붙어서 걸 수 있는 기술이 유용할지 몰라도 힘이 모자랄 때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기술이 많아진다. 제대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띄워쓰기가 필요하듯이 삶의 기술에도 적당한 거리 유지의 기술이 필요하다. 거리를 유지하는 마음의 근력이 필요하다.  


훈수 두는 회복력의 기술

스트레스나 역경에 강한 회복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거리두기’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힘든 상황을 느끼지만 조금 떨어져 역경을 바라볼 때 극복할 방법이 더 잘 보인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꼭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더라도 힘겨운 상황에 매몰되어 기(氣 ) 빨리고 소진될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회복력의 가장 기초적인 힘이다. 매몰되지 않기 때문에 뭔가 통제력을 가지고 있고 자연스럽게 자신감을 끌어올린다. 거리두기의 대표적인 사례는 ‘훈수’다. 바둑이나 장기, 어떤 문제를 푸는 상황에서 훈수를 둘 때는 자기 실력보다 나은 결과나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때가 많다. 조금 떨어져 긴장과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때 관점의 자유도 함께 가지게 된다.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방법이 머릿속에서 샘솟듯이 살아난다. 꼭 이겨야 한다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긴장감에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겹 울퉁불퉁 유성물감으로 덧칠해진 지형 모형도 속에 개미 한 마리가 있다. 개미의 입장에서 두껍게 덧칠해진 표면의 굴곡은 힘든 계곡이나 산 같기도 하고 그 속에서 우왕좌왕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형도를 떨어져 전체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실감 나는 안내가 된다. 거친 유화의 그림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전체를 볼 때 아름다움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거리를 조절할 수 있을 때 현실의 상황과 상관없이 보다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심리적 거리, 시간적 거리, 공간적 거리, 관계의 거리 등 빡빡하게 느껴지는 거리를 조절할 수 있을 때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하며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심리적 거리와 낙관적인 현실

브루엘만(Bruehlman) 등의 심리학자들은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다. 한 그룹은 힘든 상황이 10년 후 어떻게 느껴질지 생각해 보라고 했고 다른 그룹은 일주일 후에 어떨지, 또 다른 그룹은 힘든 상황이 미래의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지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이 세 그룹 중 어떤 사람들이 심리적 고통을 덜 느낄까? 10년 후로 시간적 거리를 길게 둔 사람들의 심리적 고통이 제일 적었다. 스트레스 상황을 떨어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증폭된 감정에서 벗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과장되고 비이성적인 생각을 간파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리두기 과정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모든 것이 아니라 일부라는 사실과 함께 자신의 통제력이 높아진다. 거리두기는 사람의 낙관성을 높인다. 비관적인 사람과 낙관적인 사람은 역경이나 부정적인 상황을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 비관적인 사람과 낙관적인 사람의 차이는 역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른다. 낙관적인 사람은 힘겨운 상황을 일시적이고 특별한 경우에 발생해서 곧 끝날 것으로 인식하지만 비관적인 사람은 언제나 일어나고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는 대상을 바라보는 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낙관적인 사람은 역경의 고통과 조금 떨어져 전체를 보지만 비관적인 사람은 역경의 고통과 딱 달라붙어 있다. 비관적인 사람은 안 그래도 힘든 상황을 더 통제하기 힘들게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너무 힘들고 무거운 이유는 힘든 현실에 바짝 좁아진 심리적 거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간, 공간, 관계의 거리

위험한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카이 점핑을 준비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위험의 정도는 시간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고 한다. 30일 남았을 때는 위험보다는 설레고 기대감이 더 크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 위험을 훨씬 크게 느끼며 긴장한다는 것이다. 시간적 거리가 우리의 심리와 지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적 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에서건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할 때 마음은 편안해지고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불필요하게 걱정과 불안을 곱씹으며 자신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지의 호텔을 좋아한다고 한다. 의무감이 느껴지는 집안 일과 쳐다만 봐도 무거워지는 책꽂이의 책과 글쓰기의 중압감, 때로는 슬픔을 흡수한 집안의 물건들에게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겁게 끌어당기는 공간과의 거리 조절이 작가의 창조성을 높이는 대목이었다. 긴장과 달라붙어 있던 공간에 거리를 만들면 우리의 모든 것이 변한다. 연인들의 사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갈등이 생기면 “우리 시간을 좀 가지자”라고 말한다.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면 생각할 여유와 함께 통제감 있는 선택의 기회를 찾는 것이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현실은 내면과 외면에서 느끼는 시공의 거리와 관련이 깊다. 우리가 현재를 누리고 음미하지 못하는 것은 ‘거리두기의 실패’나 '거리를 조절하는 마음의 근력'의 유연성을 잃었을 때다. 


힘든 오늘이라도 누리고 음미하는 방법은 거리 조절!

일상의 삶이 긴장 속에서 바쁘게 돌아갈 때 거리를 유지하는 마음의 근력은 굳어간다. 마음이 일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파도를 타는 방법 중에 하나는 때때로 ‘거리두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마치 남의 일인 양 바라보는 것이다. '성찰'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끌어 오지 않더라도 조금 잊거나 떨어져 보려는 순간의 선택이 거리두기다. 떨어져 바라보고 질문하는 짧은 순간들이 반복될 때 거리를 조정하는 근력은 유연하게 늘어난다.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다. 환경이나 사회적 배경 때문에 왜곡되게 보였던 자신을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다. 거리를 통해 심리적인 낙관성이 생기면 희망의 경로도 더 많이 보이고 자신의 통제감과 선택도 늘어나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와 거리를 둘 때다. 답이 어려울 때 답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답과 오히려 거리를 둘 때다. 힘든 오늘이라도 누리고 음미하는 방법은 힘든 상황과 거리를 두고 짧은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다. 바짝 좁아진 거리 조금 떨어져도 괜찮다.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전 10화 유연한 포기, 인정하고 허용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