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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준열 Nov 20. 2024

마음이 전소(全燒) 된 후 만나게 된 것

숨어있는 마음의 상처를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건,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부정적 행동들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강하게
나타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한 때 나는 와이프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었고 온 갓 짜증을 다 퍼부었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둘 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으니까.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오랜 시간 고민을 해 봤다.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상처는 무너진 "자아"에서 시작되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그것이다.

부모님은 다른 아이들과 우리 형제들을 항상 비교했다.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뭔가를 잘해도 칭찬받지 못했고... 그래서 마음속 그 꼬마아이는 항상 화가 나 있었다. 남모르게 주먹을 꽉 쥔 채로 말이다. 이럴 경우 사람의 행동은 두 가지로 나뉜다. 자기 보호를 위한 "회피"와 "투쟁"이다. 상처받은 나를 상황과 분리시켜 회피하려는 모습이 하나 있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와 싸우는 모습이 하나 있다. 형과 동생은 전자를..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의 삶은 끊임없이 가를 증명하기 위한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 일과 성과, 리더로서 조직을 이끄는 스타일은 모두 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랬던 것 같다. 난 인정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압력 또한 항상 최대치였다.


와이프에게 화가 났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평소 와이프의 행동과 말이 나를 무시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나의 무의식은 숨어있던 내면 아이를 밖으로 끌어냈다. 쉽게 말해 "발작버튼"이 작동된 것이다. 우리의 싸움이 거의 끝까지 갔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와이프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와이프는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생각과 행동이 자기 다웠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나로서 존재했고 와이프는 와이프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마이클싱어의 책 <상처받지 않는 영혼>에 나온 말처럼 나는 "내 마음의 통속극"을 그려왔던 것이다. 나 또한 스스로 찾아내었던 내면아이를 와이프에게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이제는 어떤 문제로부터 고통이 시작되었는지, 무시를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중요하지 않다. 나의 내면이 이해되었고 와이프의 내면도 함께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항상 주먹을 쥐고 있던 그 꼬마아이도 이제서야 떠나보냈다.



누구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면아이가 있다.

상처받은 자아가 치유되는 과정은 마치 전기자동차가 불에 탈때와 비슷한 것
같다. 한번 불이 붙으면 모든 것이 전소(全燒) 될때 까지 꺼지지 않으니까..


내 마음이 전소되어 태울 것이 없어진 후에야 나는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불이 붙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큰 불이 나기 전에 초기진화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태우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걸음 떨어져 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다행 때늦은 후회도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었다. 이제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절실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는지 위기감의 발로였지는 알 수 없다. 나와 와이프에게 이런 위기와 고통을 주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신 신께 감사드릴 뿐이다.



요즘은 아들 생각을 많이 한다.

아들은 나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있다. 물론 아들과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와 성향차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가끔 한다. 아니면 내가 불편해하는 나의 모습을 아들한테서 봤을 수도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나에겐 풀어야 할 숙제와 같다.


아빠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든 것일까?

아들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아들의 마음이 갈 곳을 잃었을 때 교회에서 그 마음을 받아주었던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난 걱정보다 반성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편안한 아빠는 아니었으니까.


아들과 함께 가 보았다... 이상한 교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아들의 말과 생각, 모습이 점점 배타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것이 기우일 수도 있고 와이프에게 느꼈던 "내 마음속 통속극"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들이 교회에 자주 나가는 것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의 시작일 수도 있다(선교사가 되거나 신학교를 다시 들어간다든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몸과 마음이 가니까. 


예전에는 내 상식과 맞지 않으면 우려와 걱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싫은 소리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사랑으로 인한 권면과 부정적 에너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과 근심은 사랑이라기보다 두려움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나는 내 아버지처럼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20살이 넘은 아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응원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비록 아들이 잘못 판단하고 잘못 행동해서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될지언정 스스로 인생을 깨우쳐 나가길 바랄 뿐이다. 내가 주는 인생은 아들이 만들어 가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도 내면의 상처가 모두 태워지고 난 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수 있었듯, 아들 또한 그의 생각이나 상처, 행동이 전소될 만큼 가 보고 난 후, 무엇을 진정으로 원했는지 그리고 내면아이의 모습은 어땠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 물론 그전에 뭔가를 깨닫게 되면 더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에게 부여된 시간일 뿐,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아들의 열성적인 교회 활동을 계속 go 해야 할지 stop 해야 할지는 본인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지금 태우고 있는 불이 모두 전소되었을 때 그래도 가치 있는 태움이었다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분명한 건 아들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아빠로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아들에 대한 복잡한 내 마음도 전소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을까?




사진: Unsplashalex mihu

사진: UnsplashRicardo Gomez An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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