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의 질주에 말리는 순간 나는 없어지고 경쟁자의 레이스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태준열 <존버 정신>
예전 고등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1년에 한 번 춘계 체육대회를 했는데 대회 마지막은 항상 10km 마라톤이었습니다. 저는 마라톤이 너무 싫었고 그래서 매년 이것저것 핑계를 대고 빠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결코 열외 시켜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장거리 뛰기를 잘 못했습니다. 항상 지구력과 페이스 조절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10km를 뛰어야 하는 출발선에서 지옥의 마라톤을 생각하니 차라리 일주일간 화장실 청소당번을 하는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가 제 옆에 같은 조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저와 여러 면에서 경쟁하던 친구였는데 성적도 그렇고 좋아하는 운동분야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캐릭터(?)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저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은근히 내색을 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요? 서로 싫어하는데 그렇다고 드러내진 않는 사이. 돌이켜보면 그 친구와 경쟁할 이유는 딱히 없었고 오히려 친해질 이유들이 더 많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친구가 싫었습니다.
갑자기 경쟁의식이 발동하면서 이 친구만은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탕' 하는 출발 소리와 함께 저는 힘차게 달려 나갔습니다. 초반부터 저는 그 친구를 멀찌감치 따돌렸습니다. 일단 기분은 좋았습니다. '내가 이길 거야!!' 마음속으로 외치며 내가 순위권에는 못 들어도 이 친구만은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으니까요.
그런데 중반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호흡은 힘들어졌고 다리는 힘이 풀려가고 있었습니다. 속도 역시 불규칙했습니다. 뛰었다 걸었다.. 뛰는 건지 걷는 건지... 역시 초반에 너무 무리했던 탓이었습니다. 설상가상 그 친구는 이미 나를 앞질러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엄청난 힘을 내 보았지만 결국 그 친구는 중상위권으로 마라톤을 마쳤고 저는 자그마치 "꼴찌"를 했습니다. 작년엔 꼴찌까지는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오버하고 흥분했던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사실 정말 창피하다고 느꼈던 것은 제가 꼴찌를 한 게 아니라 그 친구의 평온한 얼굴을 보면서부터였습니다.그 친구는 나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레이스에 집중했고 꽤나 괜찮은 성적까지 올렸으니까요. 반면에 저는 내 레이스에 집중하지 못했고 온통 그 친구를 의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없고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거죠.
마라톤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나와 타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경쟁"이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특히 조직생활을 하면서) 경쟁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황"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회사 동기들과의 미묘한 경쟁의식, 어쩌면 부하직원, 상사와도 경쟁할 수도 있고, 타 부서와 우리 부서와의 경쟁, 평가, 보상, 상대평가.... 어쩌면 우리는 마음속에 경쟁의 화신 하나쯤은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알까요? 내 속마음을.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당시 아무도 몰랐지만 나만 알고 있었던 부끄러움 때문에 '이긴다는 것, 경쟁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경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남이 잘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군다나 나와 경쟁하고 있는 사람이 잘 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마음은 착잡해지고 흔들립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심지어 나의 능력을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래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중위권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내가 꼴찌가 되어버린 이유처럼
나 스스로를 잃게 되면 마라톤 레이스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타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레이스에 집중한다면 설령 꼴지를 한다 해도 왜 꼴지를 했는지 알 수 있을겁니다. 그 다음은 좀 더 나아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태준열 (taejy@achvmanaging.com)
리더십 코치/컨설턴트
25년 동안 음반회사, IT대기업, 반도체 중견기업, 소비재 기업 등 다양한 기업에서 인사, 조직개발 업무를 경험하였으며 15년 동안 인사팀장/조직개발실장을 맡아왔다. 현재는 리더십 개발기관 Achieve. Lab의 대표이며 팀장 리더십, 성과관리 등 강의와 팀장 코칭, 리더십 개발 컨설팅, 조직개발 활동 등을 활발히 이어 나가고 있다. 저서로는 <어느 날 대표님이 팀장 한번 맡아보라고 말했다><Synergy Trigger><존버 정신>이 있다.
리더십코치 태준열의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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