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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교롭게도 순돌이와 순심이는 각자 중성화 수술을 당한 후에 서로를 만나게 됐다. 순심이랑 똑같이 넥카라를 하고 축 쳐진 얼굴로 내 옆에 얌전히 앉아 내 팔목을 핥던 순돌이. 안쓰러웠다. 승우와 나는 우리의 뜻이 아닌 무자비한 짓을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했다는 동질감에 빠져 각자의 강아지를 끌어안고 카페로 가서 한 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었다. 순돌이의 중성화 수술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었는지, 이상하게 그날따라 나는 다른 사람처럼 적극적이었다.
"바쁘세요?"
"아니요. 정원씨는요?"
"그럼 각자 강아지 데려다 놓고 다시 만나서 술 한 잔 할래요?"
"좋아요."
승우는 흔쾌했다. 언제나처럼. 차로 십오 분이면 갈 수 있는 해수욕장이 세 개나 있는 도시에 산다는 것도 우리가 빨리 친해지는 데 한몫했다. 셋 중 야경이 제일 예쁜 h해수욕장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가다 보면 술맛을 좋게 하는 주황색 조명이 일품인 포장마차가 나온다. 그날 거기서 우리는 소주를 네 병이나 마셨다. 오독오독 씹히던 산낙지의 식감이 생각난다. 그 위에 번들거리던 고소한 참기름 냄새도. 차가운 소주가 목을 넘어가는 청량한 기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던 승우의 웃는 눈. 그날 이후로 소주를 넘길 때면 어김없이 승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중성화에 반대한다는 것 말고도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하는 것. 오래 만난 연인에게 버림받은 것. 게으르고 대책이 없는 것. 그래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것. 맥주보다 소주를 좋아하는 것. 마리화나를 피워 보고 싶은 것. 어쩌다 보니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을 해 버린 것. 그래도 그들에게 기생하며 잘 살고 있는 것. 그것말고도 여러가지. 지금 생각해보니 바람 피우는 인간들의 한심한 합리화와 자위가 대부분이었는데(이렇게 쉽게 인정하고 자조하는 것도 우리의 공통점일 것이다.), 그땐 사랑에 빠질만 한 충분한 이유라 들떴었다. 우리의 시작이 사실은 보편적인 불륜의 시작일 뿐이라 여기니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여보! 이제 준비해야 되지 않아?"
달달한 회상이 씁쓸해지려는 순간, 남편이 나를 현실로 꺼내준다. 타이밍을 잘 맞추는 건 남편의 타고난 능력인 걸까.
남편은 의외로 내게 요구하는 것이 적었다. 사소한 일도 자기 손을 거쳐야 마음이 놓이는 까탈스러운 성격이라 내게 집안일도 많이 맡기지 않았다.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는 딱 한 가지 확실한 요구 사항이 있긴 했다. 내가 '예쁘고 세련된 아내'로서의 '포즈'를 훌륭하게 취해주기를 원했다. 남편은 그런 요구의 일환으로 오늘 같은 모임에 나를 대동하기를 즐겼다. 나는 남편의 그런 깔끔한 요구에 기꺼운 편이었다.
결혼 전에 남편이 적극적이었던 건,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의 결혼'을 향한 것이었다. 어리석게도 뒤늦게야 그걸 깨달은(어쩌면 이미 알았으나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쉽게 그러한 사실에 적응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모습에 대해 체념하는 것은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쉬웠다. 게다가 나는 남편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경험도 없으니 두번째 체념은 첫 번째 체념과는 전혀 결이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언성이 높아지는 격정이나 뭉클한 감정 같은 것을 주고 받을 적당한 공간이 확보된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갈 수 있는 한 쌍일지도 모른다.
공들여 화장을 한다. 남편은 내 원래 얼굴보다 화장한 얼굴을 더 좋아한다. 조금 타이트한 청바지 위에 남편이 선물해 준 트위드 자켓을 걸친다. 이런 날이면 들고 나가곤 하는 샤넬 클래식 백을 들고, 남편이 좋아하는 하이힐을 신었다. 만약 승우를 만난다면 어땠을까. 굽이 없는 구두나 스니커즈를 신고 카라가 없는 가죽자켓을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이 잡히지 않고 주름이 많은 판도라백을 들었겠지.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런 내 속마음과 별개로 남편은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오늘 모임은 남편의 대학 동기 모임이다. 재익씨 커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다. 애인이 어려서 결혼을 서두르지 않던 재익씨는 지난 달 갑자기 결혼을 선언하며 청첩장을 돌리고 있다. 애인인 윤아씨가 임신을 해 버린 것이다.
윤아씨는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린데다 동안이라 학생 같이 풋풋하다. 결혼 생각에 마냥 좋은지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게 보기 예쁘다.
"결혼 준비한다고 엄청 바쁘죠? 그래도 재익씨가 잘해 주나봐. 윤아씨 얼굴이 너무 좋네! 입덧 같은 것도 없나봐요?"
"네. 제가 별로 안 예민한 스타일이라 아직은 괜찮아요. 저 임신한 것도 완전 늦게 알았잖아요. 어떻게 생리를 두 달 넘게 안하는 데 몰랐냐고, 의사가 놀라더라구요. 헤헷~"
"꼼꼼하게 체크 안하는 스타일이면 모를 수 있지~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윤아씨가 귀여워 맞장구를 쳐 주다 '생리'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어? 내가 보통 10일 쯤에 하잖아? 오늘이...16일인데,,,,하......'
대화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테스트를 해봐야겠긴 하겠지만 생리 주기가 거의 일정한 편이기 때문에 임신일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달에는 했었나.
한 것 같은데.
그럼 언젤까.
남편은 콘돔을 안 쓴다.
근데 피임약을 빼먹은 날이 있었던 것 같다.
승우는 콘돔을 쓰지만
술에 취해 콘돔을 쓰지 않은 날이 있었다.
아......
모임이 어떻게 지나가고 집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내내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늘 당신 왜 그렇게 술을 안 마셔? 표정도 어둡고? 무슨 일 있어?"
"아냐. 그냥 속이 좀 안 좋아."
"괜찮아? 소화제 먹을래?"
"아니, 그 정돈 아냐."
나와 반대로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신 남편은 씻고 눕더니 바로 곯아 떨어진다.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뒤로 한 채 거실 화장실로 간다. 결혼 초기에 피임을 하지 않을 때 임신인 줄 알고 테스트 하느라 사 둔 임신테스트기가 몇 개 남아 있다. 맨발로 디딘 대리석 바닥이 차가워 소름이 돋는다. 테스트기를 소변에 적셔 내려둔 뒤, 손을 씻고 기다린다. 테스트기의 흡수부가 금방 적셔지며 빠르게 결과선을 지나고 대조선을 지난다.
선명한 두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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