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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ul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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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정체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이 배경처럼 깔린 토요일 오후의 카페.


소개팅 약속이 있는 범수는 단정히 앉아 이현을 기다리고 있다. 독일군 운동화에 진회색 슬렉스. 그 위에 연하늘색 셔츠. 염색하지 않은 적당한 길이의 머리.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뿔테 안경과 스틸 시계. 개성있어 보이길 극도로 꺼려하는 것 같은 차림이다. 긴장을 감추려 애쓰고 있지만 상당히 긴장한 표정.


입구 쪽에서 이현이 걸어온다. 약속 시간보다 18분이나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당당하게. 이럴 땐 또각또각 소리가 날 것 같지만, 그녀는 캔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다. 데님 핫팬츠에 하얀색 린넨셔츠. 가늘고 긴 목 위에 조그만 얼굴이 활짝 웃고 있다.


"안녕하세요, 범수 씨~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뭐 드실래요? 바로 사 올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사드려야죠. 뭐 드실래요? 아메리카노?"

"아녜요. 앉아 계세요. 제가 사 올게요. 아메리카노 좋아하세요?"

"아 전 뭐 아무거나 괜찮아요. 이현 씨 드시는 걸로......"

"전 아이스 카푸치노 마실건데, 괜찮으세요?"

"네네. 같은 걸로."




범수와 이현의 투명한 카푸치노 잔이 거의 비어가고 있다.


"이현 씨는 언제 결혼하고 싶으세요?"

"음,,,,,,전 아직은 결혼 생각 별로 없어요. 꼭 해야 하나? 그런 것도 모르겠고."

"아! 그럼 비혼주의자시구나!"

"네? 그런 건 아니고, 아직 그냥 생각이 없어요. 나중에 할 지도 모르죠."


빨대로 얼음만 남은 카푸치노 잔을 뒤적거리는 이현의 눈빛은 등장 때와는 다르게 생기가 없다.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 노력하지만 영혼이 자꾸만 빠져나가는 표정.


범수는 계속 진땀이 난다. 계속해서 쨉을 날려도 빗나가는 느낌. 얼음 위에 시나몬 가루처럼 마음이 꺼끌거린다. 하지만 여자에 대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최선을 다해보려는 표정.


"아기 좋아하지 않으세요? 여자들이 이현 씨 나이 또래가 되면 아기가 이뻐보이고 그런다던데?"

"아기 이쁘죠. 좋아하긴 하는데, 제가 낳아서 기를 수 있을진 모르겠어요."

"아! 그럼 결혼하셔도 딩크족 되시겠네요?!"

"음,,, 글쎄요?! 꼭 그렇다기 보단,,, 지금은 모르겠단 거죠. 결혼해서 낳고 싶으면 확 낳아버릴수도 있구~"


이현은 뒤적거리던 얼음을 입에 털어 넣고 씹기 시작한다.


"배고프세요 이현 씨?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뭐 좋아하세요?"

"음,,, 아직 배는 안 고파요. 범수 씨 배고프세요?"

"저도 괜찮아요. 무슨 음식 좋아하세요?"

"전 아삭거리는 거 좋아해요. 상큼하고 아삭거리는 거!"

"과일이나 야채 같은 거 좋아하세요? 그럼 혹시 비건?"

"후훗... 비건 채식주의자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좀 아삭하고 상큼한 걸 좋아해요. 처음 먹어 보는 것 처럼 신선한 그런 거."


빵빵한 에어컨이 무색하게 범수의 등은 흠뻑 젖었다.


"범수 씨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에 간 지 18분이 넘었는데도 이현은 오지 않는다. 범수는 의아하다.


이현 씨 무슨 일 있으세요?

 

라고 카톡을 보낸다.


잠시 후, 이현으로부터 답장이 온다.


범수 씨, 진짜 죄송한데요. 저 갑자기 너무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다음에 기회되면 봐요. ^^


범수는 어이가 없다. 티슈를 한 뭉치 뽑아서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는다.

갑자기 이현으로부터 다시 카톡이 온다. 일말의 기대를 손가락에 담아 카톡 창을 열어보는 범수.


저 범수 씨, 범수 씨가 이해하기 힘드실 것 같아서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전 비혼주의자도 딩크도 비건도 아니에요.
사실 전,,,,,,'자만추'입니다.
죄송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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