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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un 03. 2021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2


https://brunch.co.kr/@redangel619/277






윤 과장에 대한 믿지 못할 정보를 쏟아낸 그 여자는 회사 복도에 널부러져 있다가 출동한 경찰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라졌다. 윤 과장님은 누구의 연락을 받은 건지 회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하나 씨 놀랐지?! 진짜 미안해. 내가 어디가서 얘기할 데도 없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우리 하나 씨라면 내 얘기를 믿고, 들어줄 것 같아서. 다 듣고, 내 뺨을 때려도 좋아. 그래도 제발 끝까지 내 말 좀 들어줘. 하나씨는 하얀 얼굴처럼 맘도 여리고 착하잖아. 난 알아. 하나 씨가 얼마나 숨은 매력이 많은 여잔지. 나 하나 씨만은 진짜 놓치기 싫어."


윤 과장님이 애가 둘 딸린 유부남이란 건 사실이었다.  윤 과장의 비밀을 쏟아내던 그 술취한 여자와 사귀었던 것도, 그녀에게 돈 천 오백 만원을 빌린 것도 전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사실인 게 아니었다. 과장님은 내게만 그 이면의 진실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형들이 버리고 간 노모를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당뇨에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데다, 최근에 치매 증세까지 보이는 노모를 모시기가 버거워 빚을 많이 졌는데 그 빚을 갚으려다 보니 그 여자에게 돈을 빌렸다고 했다. 아내와는 사랑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윤 과장님을 쫓아다니던 아내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아무 것도 모를 때 결혼을 해 버렸다고 했다. 아이들 때문에 이혼은 못하고 있지만, 상황이 좀 정리되고 나면 언젠가는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하나 씨처럼 내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랑 사는 게 꿈이었어. 우리 하나 씨한텐 너무 미안해. 이제 무슨 면목이 있어 우리 하나 씨를 내가 보겠어. 하나 씨가 나 욕하고 때려도 할 말 없지 뭐."


남자들도 이래서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얇은 쌍꺼풀이 져 여자처럼 곱상한 눈. 깎은 듯 날렵한 콧대와 주름이 적은 보드라운 입술. 그런 얼굴의 윤 과장님이 하는 저런 이야기는 모두 진심 같았다. 나는 윤 과장님을 욕하고 때릴 수 없었다. 대신 그를 안아 주었다. 윤 과장님이 안긴 내 뚱뚱한 품은 넘치는 연민으로 가득해졌다. 아......이 남자를 어쩌면 좋아.


집에 돌아와 이성적으로 다시 곱씹어 봤다. 윤 과장님에 대한 나의 믿음과 사랑에는 한 가지 굳건한 근거가 있었다. 잘 생기고 멀쩡한 싱글처럼 보이는 윤 과장님은 마음만 먹으면 지윤이 같은 젊고 예쁜 애들을 금방이라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회사에 안 좋은 소문이 났다면 회사 밖에서라도. 근데 굳이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뚱뚱하고 못생긴 나에게 끝까지 기대어 올 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진짜 사랑'일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윤 과장님에게 더 잘해 주었다. 위로를 담은 손편지를 건네기도 하고 도시락을 싸 책상 위에 두기도 했다. 그날 꽂아 두었던 꽃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오래 갔다. 매일 물을 갈아 주며 이 예쁨이 얼마나 오래 갈까 생각했다. 특히 활짝 핀 수국을 볼 때마다 꽃집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나 혼자 웃었다. 웃으며 바라 본 화장실 거울 속의 나는, 진짜 좀 예뻐진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퇴근 후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잠도 잤다. 유부남이면 어떤가. 아내도 윤 과장님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데. 과연 지윤이 말대로 연애를 하고 나서야 내가 진짜 살아있다고 느꼈다.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이제껏 보고 듣고 읽었던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들의 사랑이 내가 가진 빈약한 사랑의 근거를 단단하게 지지해 주었다. 나는 이 사랑을 반드시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다이어트에 더 박차를 가했다. 윤 과장님이 내게 주는 찬사에 걸맞은 예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살 빼면 예쁠 것 같다.'는 거짓말 같은 인사 치레도 이제는 믿게 됐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구나. 나는 늘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녔다.






점점 부풀던 하늘색 수국이 좀 시들고, 장미도 살짝 말랐다. 카네이션만은 아직 싱싱해서, 하루만 더 두자 싶어 물을 갈아 준다. 윤 과장님이 자리에 없다. 커피라도 한 잔 사서 드릴까 싶어 건물 일 층에서 과장님이 좋아하는 더블샷 아메리카노를 산다. 아메리카노를 받아 나오는데, 어? 나와 비슷하게 뚱뚱한 여자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인다. 나처럼 뚱뚱한 여자가 이 회사에 또 있었구나. 쟤도 신입인가? 신입이라기엔 좀 도도해 보이는 인상이다. 내가 너무 오래 뚫어져라 봤던지, 뚱뚱한 여자는 차갑게 눈을 흘기며 내 옆을 지나간다. 나는 놀라 시선을 거두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큰 규모의 회사는 아니지만 우리 회사는 작은 건물 두 동을 사옥으로 쓰고 있다. 우리팀이 근무하는 사무실은 B동인데, A동만 옥상을 사용할 수 있다. A동 옥상은 사원들이 카페처럼 사용하는 곳이다. 담배를 피거나, 전화를 하거나, 몇몇이 모여 잡담을 하는 곳. 출근 전 시간에 가면 혼자 있을 수 있어 좋다며 과장님은 업무 시작 전에 종종 그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곤 한다.


멀리서 윤 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출근 시간에 딱 맞춰 오거나 잘 늦는 내가 이 시간에 여기 나타나면 깜짝 놀라겠지?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려는 순간.


"아 씨발 진짜 좆같애!! 아니 코딱지 만한 회사에 그렇게 뚱뚱한 년이 둘이나 신입으로 들어온지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당연히 우리 건물이라길래 그 년이 사장 조칸 줄 알았지. 근데 어제 정 대리 이 새끼가 뚱뚱한 사장 조카가 알고 보니 A동에 있는 팀 소속 여 사원이라는 거야! 아 좆됐어 진짜!! 난 그 년이 사장 조칸 줄 알고 지금 거의 사귀고 있는데. 씨발 어떻게 떼 내냐? 아 뚱뚱한 년들은 왜 그렇게 다 비슷하게 생겨가지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냐? 어쩐지 사장 형이 그 큰 회사를 하는데 딸이 생각보다 검소해 보인다 했어. 근데 그것도 낙하산인 거 티날까봐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지. 아 진짜 씨발 되는 일 없네!!"


커피잔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문을 열지 못하고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간다. 사무실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가만히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하나씨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어디 아파? "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부들거리며 서 있었을까. 사무실로 들어오는 윤 과장이 보인다. 나는 윤 과장 책상 위에 꽃병을 높이 들어 윤과장의 얼굴에 정면으로 힘껏 던져버린다.


 과장의 비명이 들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진다. 뭐라고 하는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쓰러진  과장을 들쳐업고 뛰어나간다.  과장이 사라진 자리에 깨진 유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사이사이 시든 꽃들이 누워 있다. 시든 수국과 마른 장미.  옆에 아직은 싱싱한 카네이션이 납작하게 뭉개져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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