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자!
시골 마트 주인아주머니가 급한 일이 있다며 우리에게 하룻밤만 봐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말하곤 돌아가며 마트를 보자고 약속했고 친구가 카운터에 앉았다. 친구들과 가게로 들어가려는 순간 허름한 차림의 낯선 아저씨가 다가와 돈 만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내게 정말 필요하다고...
별 의심 없이 돈을 빌려줬는데 아저씨는 그 돈으로 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사고 있었다.
아저씨! 그거 내 돈이잖아요. 꼭 필요해서 쓰고 돌려준다면서요. 왜 담배를 사요!
그 소리에 돌아보는 아저씨의 얼굴이 무섭게 변하며 도둑이 되었다.
우리가 놀라 카운터에 몰리자 그가 무서운 흉기를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돈을 내어 놓으라고 협박했다.
얼른 112에 신고해! 아저씨 도둑이죠!라고 말하면서 전화기를 들었지만 신호음이 뜨지 않는다.
험악한 모습으로 추하게 웃으며 더 가까이 다가온다.
어쩌지... 아! 핸드폰, 핸드폰!
근데 핸드폰으로도 112가 되지 않는다.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며 다가오는데 우린 너무 절박해졌다.
우리는 토치에 불을 붙여 그의 얼굴에 가까이 대며 당장 물러가지 않으면 진짜 경찰이 와서 잡아갈 거예요. 우리가 모두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물러서지 않자 험악했던 도둑이 당황해서 움찔거렸다. 이때였다. 죽기 살기로 마대자루, 빗자루 들통을 들고 난장을 피우며 도둑을 잡았다.
한참 어수선해진 마을.
마트의 주인아저씨가 돌아와 가게 창문에 최신식 방범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골 마을에 최첨단 방범창이라니...
친구들과 우리는 신기해하며 구경하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고생했다면서 상을 차려주셨다. 떡볶이와 낙지볶음... 우리는 뺏고 달고 맛있는 이걸 뭐라 부르면 좋을지 서로 웃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고 마치 친구처럼 이재명이 앞자리에 앉아 웃고 있었다.
우린 한참 동안 떠들고 도둑을 잡은 이야기를 하면서 먹고 놀았다.
이게 우리 수준이지. 이제야 눈높이가 맞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오늘 난생 처음 이재명이 나오는 꿈을 꿨다. 정말이다. 이재명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높이가 똑같았다. 그 아무일 없다는 듯 내 친구들과 밥을 먹고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왔다.
이건 승리의 촉이다. 60%가 될 것 같다.
친구들과 영화표를 두고 내기를 했다. 친구들은 55% 정도 난 60%는 돼야 한다고.
적어도 대한민국의 10명 중 6명은 총으로 시민을 위협하는 계엄을 반대해야 상식인 거라고.
난 혼자서 승리를 확신하기로 했다. 진심으로.
그들의 추락은 끝이 없었다. 여기가 바닥인가 싶으면 그 더 깊은 아래가 있었다.
40대가 된 이준석은 대한민국 대통령 대선토론장에서 19금을 쏟아내고 사람들이 질색하자 민주주의 투사가 되어 절대 죽지 않고 살아 님아 새벽을 보겠다며 비장한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
온갖 쌍욕을 쏟아내는 악플러들은 저런 알바를 왜 하나 싶었는데 알바 수준이 아니었다.
리박스쿨에 잠입한 미혼여성인 뉴스타파 인턴기자는 악플에 좋아요를 달다 일주일 만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학부모단체 회원이 되어 김문수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국회에서 하고, 단시간에 교육부가 인증하는 초등학교 돌봄 교실 강사 자격증을 받았다.
악플을 쓰고 아이들에게 박정희와 이승만을 알리는 학교 방과 후 교실 늘봄 강사가 될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해본 세상이다.
김문수. 그 험한 노동운동시절 자기 집에 고이 숨겨주고 대신 남영동에서 고문과 모욕을 당하던 동지들을 배신하고 나처럼 어여쁘고 고운 문학적인 사람이 그렇게 거칠고 못생긴 사람들이나 하는 노조활동을 할리 있겠냐 말한다. 도대체 어디쯤이 바닥인 건가.
남녀 사이에 팽배한 불신은 상호 신뢰를 훼손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모든 인류가 고통을 겪고 있다. 남성성이라는 과장된 이상(理想)은 곧 요구나 지속적 혜택, 영원한 불안을 의미한다. 이 요소들은 자만심과 이기심, 특권적인 지위를 낳을 뿐이며, 이는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자연적 조건과 모순된다.
여성 운동의 목표인 자유와 평등권에 반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반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같은 목표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의 삶에서 행복과 즐거움은 종국적으로 여자들이 자신의 역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의 창조에 달려있고, 또 남자들이 여자들과의 관계라는 문제에 어떤 식으로 대답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들러 [남자와 여자의 협동] 중에서
저녁을 먹고 가장 한가로운 시간에 자녀들과 함께 대통령 대선토론을 지켜보는 일은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싶어 하는 지를 지켜보게 하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공영방송에서 성범죄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19금의 표현이 듣는 이에게 어떤 모욕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킬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대통령후보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해 본 또 다른 폭력이다.
그는 안티페미니스트 대선후보라고 외국에 소개되었다.
나는 이런 수치심을 겪지 않고 싶은 것이 무슨 페미니즘인가 싶다.
여성으로 평가되기 이전에 사람으로 안전하게 일상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페미니스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어야 이해되는 말인가
심리상담을 하는 내가 상담현장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만나게 되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언젠가 성폭력 피해자를 언론 앞에서 대변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 만나게 되는 소위 성폭력 피해를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반응은 남녀를 불문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서로 만나서 화해하면 되는 일 아니냐. 전에 서로 좋아했던 사이 아니냐, 정말 바라는 게 뭐냐, 당신들을 이해하니 만나서 대화해 보자는 사람들. 그들은 피해자가 겪는 고통을 마치 지나가는 바람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악의는 아니리라 믿고 싶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 하더라도 그런 상상만으로도 하얗게 질리고, 검게 얼어붙고, 쓰러지고 토하는 그들의 신체적인 변화를 직접 목격하던 나로서는 그들의 무심한 그 모든 제안들이 더할 수 없는 잔인한 폭력으로 느껴졌다.
왜 잘못했다. 깊이 반성한다. 이 두 마디를 전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도대체 이게 뭐가 문제냐, 어떻게 더 순화해서 말하냐, 검증이 필요한 것 아니냐...
28살에 성상납을 받으며 살이 빠졌다고 SNS에 글을 남길 수 있는 대선후보를 보는 일.
오전엔 내 말이 좀 심했다면 미안하다고 하다가 오후엔 독재정권의 탄압이 시작되었다며 선량한 피해자인양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기자회견을 하는 순식간에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그의 태도.
윤석열의 초지일관된 구국의 일념보다 더 공포스럽지 않은가.
여성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성소수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장애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노동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외국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어린아이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그저 사람으로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누구나 누려야 한다고 명시된 당연한 권리를 찾아가는 일.
6월 3일. 나는 이 평범한 기적을 바란다.
제발 세상이 평범할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길.
더 이상은 이 더러운 저질의 문화 속에서 아이들을 살게 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