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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상상

나는 비열한 엘리트 시대의 종말을 꿈꾼다.

by 마음자리

계엄이 끝나고 지독했던 불안과 불면의 밤을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트럼프는 전쟁을 시작했다. 젠장.


평화와 안정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이제는 좀 상식의 시대를 열 수 있으리라는 안도감이 코스피 3000을 찍고, 제법 빠르게 자리를 잡고 출발하는 특검이 기대를 모았다. 그래. 우리도 이제 조금만 견디면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세계대전의 전조... 면 어쩌나...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트럼프가 우리나라 대통령도 아닌데 전쟁을 한들...

먼 나라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미국이 정말 먼 나라 이야기일까...

다시금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강한 나라가 지배하는 사회.

돈 많은 이들이 좋은 학원을 다니고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며 밤을 새우고 달달외운 시험 점수에 울고 웃는 시절을 산 우리가 만든 현실

너나없이 성장을 외치다 전쟁과 내란의 지뢰를 여기저기 피해 가며 불안하게 살아가는 오늘


정말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상담실에서 나보다 더 바쁜 아이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때론 폭력적이고, 때론 우울하고, 불안하고, 소심한 아이들은 가끔씩은 자해를 하는 삶을 살면서도 학원시간이 복잡해 상담시간 1시간을 맞추는 게 어렵다.

부모님께 간절히 말씀드려 보지만 나름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꼭 아이가 대단한 영재로 크길 바래서가 아니라고 했다.

직장을 다니면 맡길 곳이 없고, 학원을 안 다니면 아이에겐 친구가 없다고...

학원수업을 빠지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그래서 직장인보다 더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6살부터 19살,

인생에 무엇이든 도전하고 실패해도 좋을 무한의 가능성이 있는 이 시기

세상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기준과 척도에 맞추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미래에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일까.


아이들이 이렇게 살게 된 게 마땅히 당연한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어른들의 추억엔 냇가와 들판과 골목에서 뛰어놀며 술래잡기를 하고 놀았던 시절들이 있다.

나 역시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 몇 달을 졸라 다녔을 뿐, 그때의 학원은 특별한 부러움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3~4개의 학원을 다니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누구에게나 성장에 필수적이고 당연한 일은 아니다.


대선에 보인 젊은 이들의 선택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20대의 청년들이 가지는 억울함. 공감하긴 어렵지만 그들이 정말 난감하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부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느라 애썼지만 감당 안 되는 시기를 보낸 사람들.

세월호참사에, 코로나 재난에, 이태원 참사에, 계엄까지.

부모들은 대학을 못 가면 인생이 망할 것처럼 입시에 매달리라고 말했지만, 정작 대학을 가본들 그것으로 미래가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닌. 그래서 더더욱 대학은 지혜의 전당이 되기보다 취업전선의 맨 앞에 서있는 또 다른 학원이 되어가고 있다.


어마어마하게 똑똑한, 앞으로는 더 똑똑해질 AI가 직업의 판도를 뒤집어버리는 시대

이젠 작곡을 공부하지 않아도 음악을 만들 수 있고, 그림을 연습하지 않아도 그림을 그려주는 시대다.


열심히 세상이 하란대로 했는데, 나의 가치는 그저 보잘것없는 것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

70%의 20대 남성이 혐오와 차별을 인정했다. 누군가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이들이 되었다.

그리고 60%의 여성은 연대와 변화를 선택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불안한 일상에 변화를 만들고 싶은 이들이 되었다. 그 두 그룹은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한다. 불안으로 갈라지고 불안으로 연대하는, 갈라지고 서로를 미워하는 이들. 우리가 그렇게 사랑으로 지키고 싶었던 그들의 현실이 되었다.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무단히 노력했던 부모들. 우리가 혹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나는 가끔 발칙한 상상을 한다.


꼭 아이들이 그렇게 입시에 매달려 살지 않아도 되는 시대.

자신이 누군지, 세상은 어떠하면 좋을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삶이 될지

세상에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다른 가능성들이 열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심리상담은 마음을 움직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절망과 우울한 일상에서 용기를 내어 일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전시키는 작업.

15년의 경험을 통해 하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성장은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기준을 맞춰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변화와 성장의 순간은 자신을 솔직하게 탐색하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하여 내가 해야 하는 일의 가치를 찾았을 때. 현실이 퍽퍽함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나아가야 하는 자신만의 의미를 찾았을 때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변화를 기획하고 나아간다.


내가 누군지를 고민하는 시간.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인지를 찾아가는 시간.

자신에게 묻고 원하는 것을 시도하고 도전하며 그것을 발판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도전의 시간.

우리 아이들에게 타인에게 보여지는 결과가 아닌, 스스로를 도전하고 만들어가는 방황과 고민의 시간들이

좀 더 당당하게 허락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시간들을 기다리고 응원해 줄 부모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시험점수를 보며, 널브러진 방을 보며,

멍 때리고 있는 하염없는 시간을 보며 불안해하는 부모 대신


그 답 없는 시간들을 헤매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괜찮다고.

다른 이들과 똑같아 지기위해, 그들을 이기기위해 맹렬히 트랙을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때때로 그 트랙을 벗어나도. 주저앉아도. 설령 거꾸로 달리는 것 같아도


그대의 수많은 고민들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그 복잡한 시간들

그 시간들이 당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힘이 될 거라고

그 긴 침묵을 응원해 주는 부모가 되는 그런 발칙한 상상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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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서울대를 보내겠다고 물심양면 학원 스케줄을 꼼꼼히 체크하던 어머니가 아들이 자기 침대에 누워 멍하니 보내는 시간을 참을 수 없어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고 상담실에 왔다. 도대체 쟤가 이 금쪽같은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나는 그에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 시간의 느낌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푸른 하늘에 넓게 펼쳐진 푸른 청보리밭을 그렸다.


그 그림을 앞에 두고 엄마와 나는 아주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상담실을 나서며,

그녀는 그의 답없는 시간들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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