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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Sep 28. 2022

카약으로 시작하는 선장의 꿈



나에게 꿈이 있다. 인종간 화합을 원한다거나 통일된 대한민국의 마당을 쓸고 싶다는 거창한 꿈은 아니지만, 생각하면 가슴 뛰게 만드는 꿈 중에 하나다. 제주에서 북쪽으로는 추자도를 지나 남해안까지, 남쪽으로는 마라도를 지나 이어도까지 이어지는 길쭉한 항로를 만들고 요트며 딩기, 카약이며 윈드서핑까지 바다를 다니는 무동력 탈것들을 모아 항해하는 꿈이다. 순위라는 것이 의미 없으니 시합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고, 다만 그런 항해 축제를 만들어 보고 싶다. 

제주에 이주해 살면서 거의 매일 바다를 보게 되고 생각은 자연스럽게 저 바다 위를 어떻게 달릴까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오랜만에 낚시를 가서 잡어떼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물고기 한 마리 낚아내지 못한 날에는 바다 가운데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지고, 꼭 나가고 말겠다는 각오가 뒤따른다. 이름 붙이자면 ‘나의 항해일지’ 첫 장은 그렇게 시작됐다.

망망대해! 사방 어디로도 육지를 볼 수 없는 큰 바다의 한가운데. 그곳이 내가 꿈꾸는 여행의 목적지가 되었다. 달이 없는 밤, 한 척 배 주변을 가득 채우는 별빛과 고요를 생각한다. 하지만 빠듯한 섬 생활에 당장 요트를 살 수는 없다. 그때,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작은 배, 카약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동안 모든 관계로부터 나를 떨어트려 놓고 싶다는 바람, 마련된 길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만드는 길로 가고 싶다는 충동, 낯선 것에 대한 여전한 호기심 같은 감정들을 모아서 작은 카약을 샀다. 아, 하나 더 있다. 대어를 낚아 귀항하는 선장의 꿈!

  처음 카약을 차 위에 싣고 가족과 함께 바다로 나갔다. 나름 진수식이니까 귀빈들을 초청한 셈이다. 차 안에서 마루는 물었다.


  아빠, 오늘 우리 침수식 하러 가요?


며칠 동안 진수식 이야기를 했었는데 처음 듣는 단어였으니 저에게 익숙한, 비슷한 것으로 기억했던 모양이다. 하필 아는 단어가 침수였다니.


  아니, 침수식 아니고 진수식!


  아이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까? 카약은 보는 것과 달라서 노를 젓는 시간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올라타려고 끙끙대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쨌든, 선장으로서 배와 나누는 첫인사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안전한 포구들을 돌아다니며 몇 번의 연습을 더 하고, 드디어 마음속에 품었던 첫 번째 카약 여행을 준비했다. 날씨와 바람, 물때를 살펴 출항 날짜와 목적지를 정했다. 북풍이 약하게 부는 날이었으니 바람을 피해서 목적지는 섬의 남쪽, 형제섬으로 결정했다. 지도를 보며 예상 시간을 계산하고, 간식거리와 비상용품들을 챙겼다. 

  형제섬은 서귀포 안덕면 사계리 바다 앞에 있는 작은 무인도이다. 해안에서 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섬은 낮고 너른 지형에 갑자기 툭 솟은 봉우리가 인상적이다. 해녀와 낚시꾼을 빼면 찾는 사람이 없다. 사계포구 옆 모래사장에 배를 내리고 큰 숨 한 번 쉬고 노를 잡았다. 육지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진다. 5분 남짓 노를 저었을까? 돌아보면 배가 출발했던 백사장은 저 멀리에 있다. 수영해서 돌아간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은 곳에. 두려운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려는데 이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 있어서 비로소 보이는 풍경. 마음이 가라앉는다. 왜 배를 몰아 바깥으로 나오고 싶었는지 다시 생각난다. 제주 본섬에서는 보이지 않는 뒷면을 보고 싶었다. 못 가본 곳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대답이 보상처럼 감추어져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내 카약의 속도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비슷하다. 지도에서 예상시간을 살필 때, ‘도보 예상시간’을 기준으로 삼으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위성사진으로 미리 보아두었던 작은 모래톱에 배를 올리고 무인도에 상륙한다. 겨우 20분만 걸으면 올 수 있는 이 섬이 영원처럼 멀어 보였다. 카약을 타기 전에는.


  물론 바로 근처 바다에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고, 섬에 붙은 듯 떨어져 있는 바위마다에는 낚시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물고기와 겨루고 있지만 어쨌든 무인도에 혼자 상륙한 기분을 잔뜩 내며 가져온 간식을 먹는다. 


  망망대해는 생각보다 가깝다. 형제섬을 돌아 더 남쪽으로 나가서 섬을 등 뒤에 두자 마침내 눈앞으로 하늘과 바다만 남았다. 기분 탓일까, 너울은 더 느리지만 거대하게 다가와서 마치 이 너머에 무엇인가 있으니 와보지 않겠냐고 부르는 것 같다. 노를 멈추고 잠시 그곳에 떠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다가 이내 선수를 돌린다. 나는 아직 망망대해로 가지 않겠다. 돌아갈 곳이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바다는 갑자기 찬 바람을 맞은 살갗처럼 소름 돋는다. 수면은 작고 뾰족한 돌기들로 가득 찬다.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다는 짙은 군청색의 무거운 밸뱃을 깔아 둔 것처럼 부드럽고 큰 곡선으로 덮이고 그때 수면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먹는 것 같아서 노 젓기를 멈추면 사방에 아무 소리도 없다. 수심이 얕아지고 사람의 땅이 가까워지면 떠났던 소리들이 함께 일어난다.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상의 이름으로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 예쁜 사진을 찍는 연인의 소리, 바다를 보고 들뜬 여행객의 목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운다.


  바닷가에 서 있으면 몇 발만 더 걸어 나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조금만 더 갈 수 있다면 다른 시야가 열릴 것 같고 다른 풍경이 있을 것 같고 또 더 큰 고기가 있을 것 같다! 겨우 몸을 앉힐 만큼 좁지만 내 몸 하나를 물에 띄우는데 부족함이 없는 부력, 제법 먼바다까지 나가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작은 배! 제주 생활에서 카약은 여러모로 겪어볼 만한 선택이다. 노 저어 나갈 수 있게 되면서 제주 지도가 다르게 보인다. 근처 부속섬까지 도로가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저기, 내가 갈 수 있는 곳들. 가 볼 섬도, 해안 절벽도 많다. 길은 바다 위에 내가 노 한 번 저을 때마다 새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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