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주제 - 오해
나는 HSP다. 반백년을 살고 나서야 내가 HSP라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나도 놀랍다. 심지어 내가 HSP라는 사실을 이틀 전에야 알았다!
HSP(Highly Sensitive Person, 매우 예민한 사람)라는 개념은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Elaine N. Aron) 박사가 예민성과 민감성을 연구하고 책을 출간하며 대중적으로 알렸다고 한다. 아론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약 15~20%의 인간은 평균보다 훨씬 더 예민한 신경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감각 자극에 강하게 반응하고,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며, 세부 사항을 잘 포착하는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왜 나는 사람들한테 예민한다는 말보다 둔하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듣고 살았을까? 사람들이 둔하다고 하니까 나도 내가 둔한 줄 알았다. 둔하다는 말을 듣고 산 내가 왜 테스트에서는 압도적인 HSP로 나왔을까? 그건 방어기제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주변 환경의 변화에 예민하고 감정적인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HSP는 스스로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차단한다고 한다. 또, 어릴 때 예민한 기질의 아이들은 양육자를 더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아 성장과정에서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 ‘왜 그렇게 깊게 생각해?’ 같은 말을 자주 듣고, 자신의 민감성을 인정하기보다는 둔한 척하거나 무뎌지기 위해 노력했을 수 있다고 한다.
아! 나는 나를 평생 오해하며 살았다. 평생을 오해받고 산 나에게 참 미안해진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릴 적엔 난 정말 많이 울었다. 뭐가 그리 불편하고, 뭐가 그리 슬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참 불편했던 마음과 슬펐던 마음만 기억에 남아있다. 정말 하루종일 징징거리며 울었다. 그래서 유년시절에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저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니가 유난이다’, ‘그냥 좀 넘어가라’, ‘넌 어째 그냥 한 번 넘어가는 꼴이 없냐’, ‘니가 하도 유난을 떨어서 사람들이 다 힘들다’. 그런 말들은 하나하나 가슴에 박힌 가시 같았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구나, 내가 문제구나. 이런 죄책감 때문에 사춘기 시절이 유난히 힘들었고 집에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나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내 정체를 숨기고 살았나 보다. 그렇다고 내가 유독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예민한 아이를 키우며 우리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나는 이제 늙었다.
나처럼 타고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얼룩말을 소개해줘야겠다. 스페인의 작가인 마리사 누녜스가 쓰고 오스카르 비얀이 그린 <내 줄무늬를 찾아 줘!>의 주인공 까미다.
심술궂은 바람에 멋진 줄무늬를 잃어버린 어린 얼룩말 까미는 울음을 터뜨린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얼룩말 까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까미는 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둔한 줄 알고 인생을 살아온 내가 반백년을 살고 나서야 그건 사실 오해였다고, 알고 보니 나는 HSP였다는 진실을 이해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질까?
타고난 모습도 내 모습이고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뀐 모습도 내 모습이다. 예민한 모습의 나도, 둔한 모습의 나도 나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