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에 밥을 먹던 날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작은 비밀

by 올리가든

여름에는 열무김치가 요긴한 반찬이었다. 냉장고가 없을 때였으니 겨울 김장이 여름까지 있을 리 없었다. 엄마를 따라 동네 아주머니 집에 간 적이 있다. 다른 집들처럼 산 아래 있지 않고 들판 가운데 있던 집이었다. 아주머니는 엄마에게 “성님, 열무 비빌라고 하는데 한술 뜨고 가셔유.” 라며 얼른 텃밭에 나가 열무 한 줌을 뽑아왔다.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에다 밥을 넣고 연한 열무를 절반으로 뜯어 넣었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는 숟가락으로 쓱쓱 비벼 주었다. 깨소금까지 뿌리니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우리도 형제가 많아서 큰 양푼에다 열무 비빔밥을 만들어 먹곤 했다. 아버지가 새끼를 꼬아서 만든 둥근 멍석 위에 빙 둘러앉았다. 멍석 한가운데 비빔밥이 놓이면 각자의 그릇에다 덜어 먹으면 됐다. 큰언니든 동생이든 똑같이 둘러앉았다. 여름 저녁에는 종종 그랬다.

그랬지만 김치가 아닌 생열무를 넣고, 그것도 바가지에다 먹어본 적은 없었다. 엄마는 그 집을 나오며

“그래도 바가지가 뭐냐. 보고 배운 게 없어서..."라고 했다.

아직도 나는 열무의 약간은 거친듯한 식감, 고추장과 기름이 잘 섞인 매콤하고 고소한 맛이 생각난다.


엄마가 싫어했던, 바가지에 밥을 담아먹은 일이 또 있다. 셋째 언니와 옆 동네로 놀러 가는 중이었다. 우리 동네는 야트막한 산 아래에 200여 호가 모여 살았다. 동촌에 살던 우리는 서촌의 언니 친구 집에 가고 있었다.

산등성이에서 장사를 지내려고 묏자리를 파고 있었다. 무덤을 파는 아저씨들과 구경하는 동네 아이들이 보였다. 우리를 보고는 아는 아저씨가 손을 들어 소리쳤다.

“얘들아. 여기 와서 밥 먹고 가아.”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마을에 상여소리가 났다. 요령잡이가 딸랑딸랑 요령을 흔들고 선창을 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상여를 맨 상여꾼들은 “어허이 어야.” 후렴을 맞추며 장지까지 걸어갔다.

오늘 아침 상여의 무덤이 여기구나 싶었다.

어떡할까 망설였다. 우리는 그다지 넉살스럽지 않았다. 아이들이었지만 남한테 얻어먹거나 하는 것이 쑥스러웠다. 그날은 왜 그랬는지 가보기로 했다. 아저씨는 큰 들통에서 국을 퍼 주며 저쪽에 있는 밥을 말아먹으라고 했다. 그때 국그릇이 바가지였다.


박을 길러서 익으면 속을 파내고, 물을 푸거나 하는 진짜 바가지였다. 바가지에 밥을 떠 넣어 국을 말아먹었다. 무슨 국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맛있었다. 생각지 않게 밥을 얻어먹은 우리는 친구 집으로 가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서 산에 있는 우리 수박밭으로 갔다. 그날은 엄마가 원두막을 지키고 있었다.


아주 쨍쨍하게 더운 날이었다. 참외밭으로 들어섰다. 참외가 초록 이파리 속에서 노란 얼굴을 드러냈다. 단내가 온 밭에 흐뭇하게 풍겼다. 가장 잘 익은 것을 하나씩 따서 원두막으로 올라갔다. 햇볕이 뜨거운 만큼 과일은 달게 익는다. 윗 밭에 있던 수박밭에도 들어갔다. 둥근 수박이 여기저기 뒹굴며 익어가고 있었다.

“수박도 많이 열렸네.” 우리는 좋아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엄마는 수박을 만지면 깨진다며 그만 나오라고 했다. 밥은 먹었냐고 묻기에 oo 아저씨네 장사 지내는 데서 먹었다고 했다. 엄마는 왜 그런 데를 갔냐며 깜짝 놀랐다.

“아니, 우리가 갈려고 한건 아니고 그냥 지나가고 있었는데...”

장사 지내는 데를 간 건 부정한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미리 알았으면 밭에 들어서기 전에 집으로 돌려보냈을 거라고 했다. 길에서 본 걸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그러면 못 본채 하고 쳐다보지 말고 멀리 지나가야 한다고 했다.

본 것도 부정을 탄다는데 밥까지 먹었으니 걱정이 되긴 했다. '정말 우리 때문에 수박 참외가 곯거나 터지면 어떡하지?' 밭에 간 것도 모자라 이 밭 저 밭을 골고루 다 돌아다녔으니. 엄마는 기왕 이렇게 된 걸 어쩔 수 없다며 다음부터는 보더라도 멀리 돌아가라고 당부했다. 우리를 크게 야단치진 않았지만 엄마는 걱정이 좀 되는 것 같았다.


수박은 산수박이 달고 맛있다. 산비탈에 심은 우리 것도 씨가 까맣게 익어 참 달았다. 크고 잘 익은 것들을 따서 장에 팔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우리가 장지에서 밥을 얻어먹고 이틀이 지났을까. 따야 할 수박이 손도 대기 전에 쩍쩍 갈라졌고 단내 나는 참외밭에서는 곯은 참외가 나오기 시작했다.

‘엄마 말이 정말 맞나 보다....’

사실 이틀 전엔 난 믿지 않았다. 그런 건 미신이라고 맘속으로 생각했다. 엄마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는 심정인 듯 갈라진 수박과 참외를 밭둑으로 던져 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장지에서 바가지에다 밥을 먹었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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