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들여다보기 5
여행과 연애는 본인에게만 특별하다. 반복될수록 타인에겐 지겹다. 그런데 장르로서의 로맨스는 물리지 않는다. 대부분 뻔할 사연에서 특별한 찰나를 놓치지 않는 기민함, 클리셰를 변주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로맨스로서의 제인 오스틴’을 언제나 지나칠 수 없다.
처음으로 <오만과 편견>을 읽었을 때 조금 어리둥절했었다. <폭풍의 언덕>이 고무시킨 기대치와 달리 너무 고요했다.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마스터피스로서의 당위가 확 와닿지는 않았다. 로맨틱함의 역치도 낮았다. 부정해 보아도 종종 가슴 한구석 은숙킴에 휘둘리는 K드라마국의 독자는 매운맛이 필요했다. 로맨스 장르의 시그니처가 이토록 데면데면하다니! 나처럼 원전의 건조한 분위기에 당황한 독자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인용이던 차용이던, 숭배던 폄하던 독서의 방향마다 매번 등장하던 제인 오스틴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서쪽 숲 나라, 오만과 편견 https://brunch.co.kr/@flatb201/115
#제인 오스틴, 독자여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https://brunch.co.kr/@flatb20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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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샬럿 루카스의 응접실 https://brunch.co.kr/@flatb201/305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1(판본) https://brunch.co.kr/@flatb201/306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2(예문) https://brunch.co.kr/@flatb201/307
#오만과 편견 그리고 팬픽 https://brunch.co.kr/@flatb201/308
#제인 오스틴과 펭귄 https://brunch.co.kr/@flatb201/310
#제인 오스틴의 숙녀들은 왜 걸어 다닐까?
#의뭉스러운 숙녀들
어떤 장르던 레퍼런스는 있기 마련이다. 제인 오스틴보다 좀 더 앞서 집필활동을 시작한 프랜시스 버니는 18세기에 유행한 서간체 스타일의 데뷔작 <이블리나 Evelina>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현재는 버지니아 울프의 비평으로나 언급되는 잊혀진 작가지만 프랜시스 버니의 문학성은 대중적 감각에 있었다. 규범적 여성상이 요구되던 당시 현실성이 느껴지는 인물이 이끌어 가는 쉬운 이야기는 인기몰이를 하며 막대한 수익을 냈다. 재미있으면서 잘 팔리는 작품! 프랜시스 버니의 성취는 제인 오스틴이 품었던 야심이기도 했다.
작가적 성공과 별개로 가문마저 부유했던 프랜시스 버니는 브론테 자매나 제인 오스틴처럼 궁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프랜시스 버니는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규정되지 않던 시대의 인물이었고 가부장적인 집안 눈치를 보며 비밀리에 글을 써야 했다. 가족들에게 독려받았지만 제인 오스틴 또한 계급사회적 구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A Lady란 무명의 필명으로 시작한다.
올콧처럼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제인 오스틴에게도 동시대의 여성 작가들은 레퍼런스였다. 제인 오스틴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전체 필모가 이루어낸 수익은 <이블리나> 한 편과도 비교할 수준이 안된다. 그런데도 어째서 제인 오스틴은 로맨스 장르의 시그니처가 된 걸까? 제인 오스틴은 패니 버니라는 레퍼런스를 온전히 쫓아갔을까?
서로 다른 작가들의 세공에도 로맨스의 킥은 대체로 비슷하다. 혐관의 거리감, 오해와 질투를 거치는 각성, 시련으로 인한 애틋함은 익숙하지만 매번 반응하게 된다. 연심이라는 감상성은 편리한 개연이 되어준다. 무엇보다 스스로 번복하는 절대가치-각성 이전이라면 절대 할 리 없는 선택을 하는 인물에게 사로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의도적인 거리를 위한 조소가 둘만의 긴장으로 바뀔 때, 촘촘한 질투마저 상대에 대한 혐오로 오해될 때, 그럼에도 거둘 수 없는 시선에 갈팡질팡할 때 독자인 우리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 기사가 아닌 이가 기사의 품위로 행동하며, 함께 춤추지 않겠다 다짐한 이의 앞에 다가서고, 절대 사랑하지 않겠다던 그 사람만을 원하게 될 때.. 아, 사람의 마음이란 왜 이렇게 제멋대로인 걸까?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기적, 구원과 파국 어느 쪽도 수용할 수 있다는 환상은 어린 시절의 낭만적인 낙관을 부풀린다. 제인 에어의 호방한 선언, 주디의 들뜬 선택을 로맨스의 주체로 진입한 나이에 다시 읽고 얼마나 씁쓸했었나.
<오만과 편견>은 매뉴얼을 따르듯 정확히 계량된 로맨스 법칙이 빼곡하다. 제인 오스틴의 연인들은 사랑 혹은 모든 것의 완결인 ‘결혼’에 닿기까지 촘촘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정작 독자들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연인들의 구체적인 후일담은 단촐하다. <설득>을 제외하면 서둘러 ‘처리되는’ 느낌마저 든다.
제인 오스틴이 생각한 ‘재미’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해피 엔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으로 헤쳐나가는 후일담까지의 여정이야말로 제인 오스틴이 추구한 로맨스의 행로였다.
2차 창작으로서의 팬픽은 원작의 특정 요소를 극대화한다. 원작의 허술한 틈, 구체적이지 않은 여지가 2차에선 되려 메이저로 흥하는 이유이다. 로맨스 팬픽은 특히나 독자가 이입할 수 있는 구체성을 동력으로 삼는다.
패러디와의 차별점은 세계관을 공유하되 원작의 레시피로 희망하는 관계성을 쌓는데 주력한다. 이미 구축된 원작의 세계관이 별도의 수고 없이도 약속된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에 팬픽의 독자는 CP의 관계성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유연함은 극강의 충족과 반발을 함께 선사한다.
내 경우 2차 작품을 원작에서 파생된 별개의 세계관으로 선 긋고 시작하기에 AU나 장르 변형에 큰 거부감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굉장한 2차라 할지라도 원작의 코어가 되는 가치를 배반하는 작품은 배제하게 된다. ‘원작이 항상 이긴다!’라기 보단 ‘완전히 다른 세계임에도 원작의 코어를 어떻게 보존하고 변주하는가’는 2차 장르만이 선사할 수 있는 해소라고 생각한다.
팬픽을 읽게 된 본격적인 계기는 뭣도 모를 때 읽은 <은하영웅전설>에서 <반지의 제왕>으로 이어지는 취향 때문이었다. 대체역사물을 선호하는 편인데 소위 ‘빻음’으로 뭉뚱그려지는 부조리에 대한 거부감을 다소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혐관을 위해 도구화되는 부조리나 혐오를 시대성의 핑계를 대고 읽곤 했다. 그런데 이런 핑계조차 무색하게 최근 랭킹의 흐름이 수년 전 보다도 더 공고한 계급주의 일색이었다. 우월한 위치를 추락시켜 보상의 간극을 극대화하는 연출은 효율적이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선망되고 무한 복제되는 계급주의 로맨스라니. 선민사상의 종착지는 결국 단두대이며 현실의 순혈 계급이란 매부리코와 주걱턱으로 귀결될 뿐인데 말이다.
특히 헤테로 CP 로맨스의 경우 관성적 대리만족을 동반하기에 대부분의 여성 주인공들은 단점마저 완전성으로 소구 하게 된다. 반전 매력을 위해 단점이라고 주장될 뿐 민폐나 사고의 치명성은 예방된다. 오히려 여성의 주도권은 종종 상대의 면죄부를 위해 소비된다. 지성에 대한 강박, (특히 성애의 측면에서) 서투름, 겸허함의 외피를 동반하는 이런 방어기제가 좀 지겹다. ‘모에’가 주는 클리셰적 즐거움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책이 아닌 보석을 탐하는 것은 경박한가? 지성에 못 미치는 외형적 촌스러움은 꼭 남자 주인공의 섬세함에 의지해 개선돼야 하는가? 멍청하거나, 농염하거나, 거만한 여성이 순정까지 차지해선 안 되는 건가?
또 소위 떡신, 섹텐 Smut이 목적인 텍스트는 금세 물렸다. 성애 장면에 몰두한다는 수치심 때문이 아니다. 관계를 농밀하게 저어주는 아슬아슬한 긴장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나. 그럼에도 BL을 포함해 상대의 면죄부를 위해 러브신에서만 약자에게 주도권을 준다거나,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만 수용한 특정 카테고리를 더 이상 소비하게 되지 않는다. 원작이냐 창작이냐를 떠나 너무 기만적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찾아낸 운 좋은 연인이 현실에도 있긴 할 것이다.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 그 희소함은 현실에선 대부분 오해나 타협에 가깝다. 때문에 로맨스는 판타지로 소구 되며 그 어느 장르보다도 착즙 된 환상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나 여성이 선택했다는 것만으로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로맨스의 텐션을 위해 현실의 고육만 쏙 거세해 버린 취사 편집에 더 이상 동하질 않는다. 트리거가 제거된 안전한 환상을 파는 것이 이 장르라 해도 기울어진 매뉴얼을 자발적으로 학습하고 싶지 않다. 모든 원작이 시대성의 한계라는 변명으로 도망치더라도 재해석이라는 명분 아래 나 자신의 혐오나 오독을 전시해선 안될 일이다.
그렇기에 혐오범죄 전성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로맨스를 읽는다는 자체가 종종 위악으로 느껴진다.
이런 거부감이 단지 문학엄숙주의에 사로잡힌 편견일까? 로맨스의 외피로 포장되어 계승된 부조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가 이 죄책감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도락이건 삶의 지침이건 소설은 지금처럼 당연하지 않았다. 로맨스는 현재도 만만하게 폄하된다. 제인 오스틴과 패니 버니가 추구한 목표는 같았지만 ‘재미’는 달랐다. 소설이 신생 장르였을 당시 여성 작가들의 등장은 전복적이었음에도 기존 사회구조를 뒤엎을 의도가 없었다. 그 자신도 여성이었던 여성 작가들은 여성 권리 투쟁의 최전선에서 불타오르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인지도 있던 여성 작가들 중 제인 오스틴을 제외한 대부분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혁명성을 비난했다. 그녀들이 모두 명예 남성이었을까? 그런 이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시대성을 뛰어넘을 통찰이 없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라 공식 선언한 적도 없고 모든 작품은 로맨스였던 제인 오스틴은 스스로를 시골 숙녀로 지칭했다. 그러나 한껏 낮춘 것은 호칭뿐 제인 오스틴의 야심은 높은 곳에서 번득였다. 로맨스의 외피를 쓰고 실존적 여성, 계급 전복, 여성 창작자로서의 성취에 기준 둔 완결을 바랐다. 화법은 달랐지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품었던 소망과 다르지 않다.
무수한 장르에서 우리가 끌리는 것은 여전히 그런 ‘이야기’이다. 사랑 앞에 고장 난 서툰 연인들을 응원하지만 성별이나 사랑을 빌미로 폐기되지 않는 대등함, 은폐된 권리에 대해 의아함을 제기하는 반추, 그리하여 죄책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이 존재하는 이야기. 문학이던 팬픽이던 결국 그 글들이 우리의 삶에서 끌어올려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적 성찰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소비에 치중한 독자라 해도 현재를 사는 여성은 우리 자신이다. 미래의 그녀들은 우리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도락의 쾌감에도 의심과 질문이 분리될 수 없다.
로맨스에 의지하는 날도 있겠지만 로맨스의 외피를 쓴 강요를 당연히 거부할 수 있다는 확신부터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의 탐독은, 우리의 글쓰기는 언제나 그 지점에서 시작돼야 하는 것 아닐까?
“1800년 무렵에 증오도 고통도 두려움도 없이, 항의하는 법도 설교하는 법도 없이 글을 쓰던 한 여자가 여기 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법이기도 했다.”***
@인용/
*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콧
**Women's Liberation Movement 슬로건, 1970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