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첫째 주 비버 이야기
4월이 왔다. 경험상 감히 봄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확실히 날씨가 푹해지고 해가 길어졌다. 그 말은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하루 종일 밝은 백야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기에, 더 늦기 전에 오로라를 제대로 보고 싶어 졌다(라고 했지만 사실 괜찮은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레스토랑에서 같이 일하던 일본인 친구가 오로라 빌리지 Aurora Village 라는 회사에서 투어가이드로도 일하고 있어 물어봤다. 거기 가면 오로라가 정말 잘 보이냐고. 밤이 되면 늘 넘실 거리며 인사하는 오로라인데 굳이 돈을 주고 투어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친구는 도시 밖으로 나가면 불빛이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오로라가 깨끗하게 잘 보인다며 시즌이 끝나기 전에 빨리 오라고 꼬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4월의 어느 밤에 오로라 마을로 야간 투어를 떠났다. 모처럼 돈을 들였으니 최대한 밖에서 오래 버틸 요량으로 옷을 껴입었다. 옷으로 퉁퉁해진 내 결심을 이해했는지 다이앤이 두꺼운 패딩도 빌려주었다. 패딩까지 입고나니, 누가 툭 치면 어디까지고 구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맘껏 눈 밭을 구르면서 오로라를 볼 수 있겠어! 가슴이 벅찼다.
오늘 밤만큼은 나도 관광객.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길 가에 선 버스에 조용히 올라탔다. 시내를 빠져나간 버스는 곧장 컴컴한 밤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오직 별 빛과 오로라만 있는 곳으로.
오로라 빌리지. 밤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마을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꽁꽁 언 호숫가에 티피 Tipi 라는 원주민 텐트 몇 개만 서 있는 풍경. 티피 안에서 나오는 노란빛이 까만 밤 속에서 따뜻하게 퍼졌다.
한참 차를 타고 아무런 빛도 없는 이 곳까지 오로라를 찾아왔는데, 아주 미약한 물결을 본 게 전부라 살짝 실망스러웠다. 오로라 홍보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거대하고 선명한 오로라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 것인가. 엄청난 장관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진으로 건지기도 힘든 희뿌끄레한 것뿐이라니. 오늘 오로라가 약한 날은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밖에서 코끝이 얼얼해질 때까지 오로라가 선명해지길 기다리다가 몸에 감각이 둔해질 즈음, 화목난로가 있는 티피 안으로 굴러 들어가 몸을 녹이길 여러 번. 따뜻한 차도 마시고 메이플 시럽이 든 버터를 왕창 바른 퐁신한 빵도 먹었다. 힘을 내요, 오로라여. 하늘을 가득 물들여 봐요.
밤이 깊었네. 사방이 이미 더 어두워질 수 없을 만큼 깜깜해, 가만히 눈 쌓인 호숫가에 누우면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어둠은 소리도 먹어버리는 듯,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가끔 얼은 몸을 녹이려 티피로 향하는 누군가의 눈 밟는 소리 빼고는 고요했다.
서서히 초록 물결이 또렷해졌다. 천천히, 누군가 먹색 하늘에 붓질을 여러 번 한 듯 진해졌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묶어놓고 노출을 되도록 길게 주면서 사진을 찍었다. 눈으로만 보는 게 아까워서 찍고 또 찍었다. 그러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겹겹이 입은 옷 속에 넣고 소중하게 품었다. 눈 덮인 호수에 누워 헤엄치듯 팔다리를 휘저으며 오로라를 보다가 카메라가 녹으면 다시 삼각대에 걸었다.
일본에서는 부부가 함께 오로라를 보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다고 해.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커플로 많이 오는구나. 일본에서 이 먼 곳까지 여행을 오는 걸 보고 내심 놀랐는데, 그런 속설이 있는 줄은 몰랐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신혼여행이라고 하면 왠지 하와이나 몰디브 같은, 어딘가 이국적이고 더운 곳의 이미지가 강한데. 눈이 어마어마하고 이토록 추운 곳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평생 행복하게 함께하고 싶어서.
이 추운 곳에서 서로 손을 꼬옥 잡고 밤새도록 오로라를 본다. 없던 사랑도 퐁퐁 솟을 지경인데, 신혼부부라면 어떻겠나. 둘의 가족과 친구, 둘을 아는 모든 사람 앞에서 서로 평생 함께 하겠다고 엄숙히 맹세를 하고, 이 먼 곳으로 날아와 꿈처럼 아름다운 이 너울거림을 함께 바라본다. 분명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살면서 어느 순간 서로가 미워지는 때가 오더라도 다시 이 풍경으로 돌아오겠지. 서로의 맹세를 떠올리겠지. 그렇게 또 고비를 넘기고.
언젠가 나도 여기에 기억의 은신처를 만들 수 있을까.
오로라에 관한 속설
내 기억에 친구는 분명 저렇게 말을 했었는데 정말로 그런가 찾아보니 실제로는 ‘오로라를 보며 첫날밤을 보내면 천재가 태어난다’는 속설이었다. 아마도 친구와 나의 서툰 영어가 빚어낸 오해인 것 같은데, 나는 내가 들은 속설이 더 마음에 든다. 이힛.
오로라 빌리지
예전에는 대게 일본인 대상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한국어 홈페이지도 생겼다. 오로라 빌리지를 포함한 다양한 투어 상품이 많다.
http://www.auroratour.com/aurora_village
그날의 오로라 지수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오래 머무는 여행자라면 하늘의 뜻에 맡기겠지만, 멀리서 떠난 여행자라면 투어 예약 전에 미리 오로라 지수를 확인하는 게 유용할지도. 개썰매에 대한 환상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옐로나이프에서 기대할 건 오로라뿐인데 오로라를 제대로 못 보고 온다면 마음이 많이 아플 테니까.
https://astronomynorth.com/aurora-forecast/
http://www.northernlighthouse.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