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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3.내가 살곳이 아니라면

브런치북_다시, 제주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펜과 포스트잇을 찾아 들었습니다.

한장씩 빨간 싸인펜으로 필리핀 현지화 가격을 크게 써서 눈에 보이는 대로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비싼 냉장고, 세탁기, TV, 피아노에 먼저 포스트잇을 붙이고 이후 싱크대 상부장을 열고 그릇과 접시들을 모두 꺼내어 식탁위에 늘어 놓았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포스트잇에 가격을 써서 붙였고 이후에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자잘한 소품들을 모아 마당에 내어 놓고 벽에 걸려 있는 커텐과 옮기기 힘든 책상과 침대에도 가격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였습니다. 신발장으로 가 신발들을 모두 꺼내어 마당에 늘어놓았고 창고로 가 매장 오픈할때 쓰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공구며 재단된 나무들, 주방집기들까지 죄다 마당에 늘어 놓았습니다. 빨래를 말리기 위해 가져왔던 행거를 마당 한가운데 놓고 옷장에 있던 옷과 가방을 꺼내어 행거에 걸고 가격표를 붙였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매장을 운영할 때 썼던, 현지에서 오픈하면 쓸일이 있을까 싶어 가져온 블랙보드 입간판을 눕히고 형광보드펜으로 'GARAGE SALE'을 꾹꾹 눌러 썼습니다. 다 적은 입간판을 마당 입구에 세우고 가방들 틈에서 천으로 된 크로스백을 꺼내 둘러메고 거슬러줄 필리핀 현지화를 지갑에서 세어 가방 주머니에 모두 채워 넣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름이 걸려 도착한 이삿짐을 받은지 정확히 일주일만의 일이었습니다. 


필리핀 앙헬레스 한국인 타운하우스에서 갑작스런 게라지 세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타운내 옆집 피아노 선생님의 소개로 현지에서 개척교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한국인 목사님이 찬송때 쓸 피아노를 제일 먼저 사 갔습니다. 저희 사정을 대강 아는 한국인 이웃들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와서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사 가기도 했고, 평소 한국제품을 들여오려다 국제 배송비 때문에 주저하던 그들의 지인들이 소식을 듣고 와서 사 가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가장 큰 고객은 예상외로 가난한 필리핀 현지 서민들이었습니다. 타운내 한국인 주인집에서 아이를 봐주고 빨래를 해주고 운전기사를 해주고 새로짓는 집터에서 집을 짓던 가난한 그들이 저의 가장 큰 고객이 되었습니다. 내리쬐는 한낮의 도로를 신발도 안 신고 벗은 발로 다니던 공사장의 인부들, 주인집 아기를 품에 안은 가정부들, 주인의 차를 몰고 정원을 손질하던 꾸야들이 에누리도 없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물건들을 사 갔습니다. 오히려 이 물건 저 물건 집었다 놨다하며 깍아달라 줄기차게 요구하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 사람들로 온지 한달만에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우리 이야기를 듣자 유감이라는 말만 했습니다.


고객중 가장 큰손은 옆집 꾸야의 친척 노부인이었습니다. 세일이 시작되자마자 늘어놓은 물건들을 스캔하고 간 옆집 꾸야는 자신의 잘 사는 부자 친척을 불렀습니다. 부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꾀죄죄한 몰골로 전대를 메고 온 노부인은 오자마자 그 비싼 전자제품들을 다 사겠다며 에누리도 없이 메고 있던 가방의 지퍼를 열고 현금을 세어 즉석에서 계산했습니다. 그 노부인이 사간 물건들이 가장 많았는데, 마지막 날까지 우리에게 필요했던 세탁기와 냉장고, 식탁은 미리 예약을 해두고 마지막날이 되자 소 달구지를 연상케 하는 낡은 트럭에 맨발의 인부들을 가득 싣고 와 순식간에 모두 실어갔습니다. 

필리핀 사람 중에선 좀처럼 보기힘든 얼굴이 하얀 타운옆 양계장 주인여자는 며느리와 손주까지 데리고 와 값나가는 벽시계와 망사커튼을 거금을 주고 사 가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국제이사를 할때만 해도 '이게 필리핀에서 필요하겠어?' 하면서도 매장 오픈하면 다 아쉬울것 같아 바리바리 싸들고 간 언니네가 쓰지 않아 가져왔던 오래된 낡은 침대, 목공을 배우기 시작한 남편이 만들었던 탁자와 책꽂이, 중고로 사들였던 주방집기들과 새 모델로 교체하면서 우리에게 주셨던 엄마의 오래된 김치 냉장고까지. 어쩌면 한국에서 처분하기엔 헐값으로도 못 팔았을지 모를 그것들을 한국산이 귀했던 그곳에선 모두 알뜰하게 제값 주고 팔 수 있었습니다. 


취미삼아 그렸던 DIY 유화그림,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쓰지 않을 낡은 전자패드, 느려 터지기가 나무늘보만했던 20년된 노트북, 가게오픈 때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벽시계, 손 때묻은 화장실 청소도구까지 싸그리 알뜰하게 팔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소위 말하는 '명품과 책'이었습니다. 

오래되긴 했지만 진품이었던 샤O, 구O 핸드백과 페라OO 구두들, 그밖에 명품까진 아니었어도 제법 돈을 주고 구입했던 메이커 정장옷들, 천연 가죽으로 만든 서류가방은 그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던 낡은 티셔츠와 신고 있던 운동화까지 탐내며 팔지 않겠느냐던 그들이었지만, 명품은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슬리퍼도 없이 맨발로 다니는 그들에게 발O, 페라OO 구두가 무슨 소용이겠으며 치장한다고 해봐야 얼굴에 화장하고 귀걸이 한채 집안 일하고 애보는 그들에게 샤O백과 아르마O 정장이 무슨 소용이었겠습니까? 

또한 한국책이야 한글을 읽을 수 없는 그들에겐 당연히 의미 없었겠지만, 이제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작은아이를 위해 가져갔던 그 많던 영어동화책마저 나중엔 거저 준다는 소리에도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대부분 자녀들이 어렸음에도 책에는 참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낙후된 국민성의 원인이 짐작되어 씁쓸했습니다.  

 

GARAGE SALE을 한지 정확히 열흘 후, 내놓은 물건들을 거의 처분하고 남은 자잘한 것들은 옆집 꾸야에게 선물삼아 알아서 처분해줄 것을 부탁하고 나자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아직은 한겨울일 한국에서 입을 겨울옷과 책들을 두개의 이민가방에 담고 노트북 두개는 따로 챙겨 들었습니다. 야밤도주하듯 혹시라도 매니저와 그의 일당들이 우리의 공항가는 길을 막을까 불안해하며 반납할 렌트카를 수거하러 온 업체에 공항까지 태워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클락에서 서울로 출발하는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길, 어두운 밤거리에 달이 휘영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필리핀 클락의 밤거리는 더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두달전, 아이와 함께 도착했던 필리핀 밤거리가 떠올랐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SM몰의 매장을 보고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 처음 왔던 한여름의 클락도 생각났습니다. 그 여름, 2박 3일의 짧은 일정속에 만났던 매니저와 직원들, 당시만 해도 화기애애함 속에  제게 '보스'로 깍듯이 부르던 그들에게 주었던 신뢰와 따뜻한 정을 떠올리며 씁쓸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그간 고단했던 한국생활의 보상으로 잠시 편안히 지내려 온 필리핀에서 지은 죄도 없이 피해자여야 할 우리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그 밤 도망치듯 클락을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갈비뼈가 앙상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한 남편과 아직 어린 둘째를 데리고, 당장 한국에 도착해 돌아갈 집도, 직장도 없는 빚쟁이의 신세로 빈털털이가 되어 한국으로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젋지도 않은 제 나이 사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이미 마음의 정리를 했음에도 생각할수록 제 신세가 기막혔습니다. 눈물은 이미 사업이 사기였단 걸 인정한 이후 필리핀의 불타는 저녁 노을길에 주저앉아 충분히 흘렸기에 더이상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무사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기만을, 그것만을 바라고 또 바랬습니다. 

다행히 그 밤 저희들은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고, 다른 관광객들에 섞여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칠흑같은 밤을 지나 여명이 밝아올 때 한국땅에 도착했습니다. 겨울에 한국을 떠나며 더운 나라로 가는 길에 두꺼운 겨울 파카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넣었던 겨울옷들이 한겨울 영하의 기온속에 위로하듯 우리의 몸을 감싸주었습니다. 급하게 쑤셔넣은 기우뚱한 이민가방 두개를 이리저리 끌며 한동안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망연자실했습니다. 최소 일년은 있을꺼라며 주변 사람들과 웃으며 한국에서 작별인사를 한지 불과 두달만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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