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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6. 절박함은 사람을 강하게 하는가

브런치북_다시, 제주

"여러분, 토요일밤 한국 축구 보셨습니까? 손흥민 선수의 눈물. 절박한 사람은 종일 그렇게 뛰어다니고 최선을 다하는데 다른 선수들은 도저히 열심히 한다고 보기 힘들더군요. 4년전만 해도 반칙을 주는 심판한테 쌍심지 켜고 대들던 핏발선 그들의 눈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 뭐 얻을거 다 얻었다 이거지요. 사람이 그렇게 절박함이 없으면 태도가 달라질수 있구나 전 그걸 느꼈습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실시되는 교육세미나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마지막 직장이라고 여기며 들어온 곳. 저는 10년만에 다시 교육컨설팅 회사의 정규직으로 입사를 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은 다함께 모여 인터넷으로 유명강사들의 강연을 보고 간단한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의 연사는 지금도 공중파에서 자주 볼수 있는 한 중견 남성배우로 6년간의 무명배우 생활끝에 미국이민을 위해 출국했으나 현지 도착 첫날 호텔방에서 한국 제작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오디션을 보기 위해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고 비즈니스석을 타고 와 오디션에 임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현업에서 성공적으로 얼굴을 알리며 일하고 있다는 그는 그때의 그 간절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도 없었을 거라 했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던 제 머릿속은 복잡해졌습니다. 

'절박함이라고? 나만큼 절박한 사람이 여기 이 자리에 또 있을까?'

필리핀행부터 시작된 지난 이년의 시간은 우여곡절 많았던 제 인생에서도 최고로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흔히들 얘기하는 그 절박한 시간들의 연속이었고 그 절박함속에는 경제적 이유와 함께 그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이 컷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컨트롤이 없었다면 제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절박함으로 사람이 강해진다면 지금의 저는 얼마나 강해진걸까 되새겨봤습니다. 좌절과 방황의 시간들을 지나 그토록 원하던 정규직, 그것도 사무직에 다시 취업을 했으니 그간의 절박함으로 인한 간절함의 화답으로 감사해하며 행복하게 지내야 하는게 맞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는 갈등과 답답함 속에 저는 그 어느 때보다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절박함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주변인들의 기대치와 다그침은 또한 얼마나 가학적인가도 생각했습니다. 

'누구누구가 사업하다 쫄딱 망했다더라, 그런데 그 경험으로 금방 재기해서 다시 잘됐다더라, 그래서 사람은 망해도 보고 어려움도 겪어봐야 한다.' 

참 쉽게들도 얘기한다 싶었습니다. 지금 빗대어 말하고 있는 축구선수에 대한 그 비난과 충고는 편안히 티비 앞에서 채널 돌려가며 입맛대로 찾아보는 시청자들에게는 참 쉬운 것들이겠지만 저는 묻고 싶었습니다. 그 선수들만큼 숨차게 뛰어봤는지, 고되게 훈련해봤는지,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리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해봤는지, 텅빈 운동장에서 울어봤는지,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 책임감에 가슴이 무너져봤는지, 하루하루가 다를 체력을 4년전과 비교할수 있는지, 정신력만으로 육체적 한계를 지배할수 있다고 믿는지, 그렇게 나불거리는 그대들은 과연 얼마나 어디까지 절박해봤는지.

참 꼬였다 싶었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이. 그랬습니다. 전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생활고, 갚아야할 빚, 책임져야 할 가족, 깊어진 부부간의 불화 그런건 사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어느정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일만큼 반복적이고 일상화되어버렸으니까요. 올해 들어 가장 힘들었다 여겨졌던 지하철 매장에서의 추위도, 나를 속였다며 분개했던 이후 보험회사에서의 생활도, 조금 멀리는 그 종족들은 다 싸잡아서 망해버려야 한다며 분노에 떨게 만들었던 필리핀에서의 악몽도 어찌보면 지금의 생활만큼 답답하진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영업이 되든 안되든 매달 따박따박 주는 월급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입사가 되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4대보험, 너무도 당연한 주5일 근무와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여름휴가와 명절휴가를 찾아 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내 나이 마흔여섯에 새파란 이십대들과 함께 차별없이 근무할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사무직으로 일할수 있다는 것 또한 포기했던 꿈을 이룬 기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름만으로도 꽤나 폼나는 컨설팅 회사에 말입니다.

두번의 면접을 거치고 이십대 아이들과 똑같이 3개월 수습의 조건으로 입사한 첫날, 자기소개를 하라는 대표의 말에 세미나실 앞에 섰습니다. 그간의 경험과 연륜으로 조금의 떨림도 없이 차분히 모여앉은 직원들 눈을 마주보며 제 소개를 하는 그 순간 보았습니다. 생선 좌판의 물 다 빠진 물고기 눈들 같았던 직원들의 눈빛을. 아직은 창창한 이십대. 그 나이에 그렇게 심드렁하고 건조하기도 힘들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또릿하고 반짝거리며 생글거리던 눈들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일 입사한 저보다 정확히 일주일 먼저 들어온 신입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을 안고도 따박따박 주는 월급의 힘에 전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절히, 절박하게 나인 투 식스의 근무시간과 정장입은 사무직, 그리고 그에 따르는 복리후생이 제겐 너무도 그리웠던 자리였기에 대표의  썰렁한 농담에 억지웃음을 장착하며 미소 지었고, 저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대리의 핀잔에도 참았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업무는 인내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면접때부터 딱히 제게 수습기간 동안은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대표의 말처럼 제게 주어진 업무는 매일 가망 고객사에 전화를 걸어 채용과 교육니즈를 물어보는 일이전부였습니다. 그 누구의 업무지시도, 자료제공도 없이 전화기만 돌리던 제게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침 6시부터 울려대는 단톡방 알람이었습니다. 그 단톡방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모든 직속권한을 갖고 있는 대표가 보내는 업무지시와 업무를 보고하고 내용을 숙지했다는 직원들의 카톡이 쉬지 않고 울려댔습니다. 

의미없는 단순업무와 경직된 분위기, 느낌없는 인테리어의 사무실 공간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감옥처럼 느껴졌습니다. 입사할땐 여기가 내 커리어의 마지막이다, 여기서 온전한 내 아이템과 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퇴사하지 않겠다던 다짐은 하루가 다르게 1년만, 6개월만, 아니 3개월 수습후 온전한 월급 받을때까지만에서 한달을 채워 월급받을 때까지만으로 바뀌다 어느날은 당장 집어치우고 이 아까운 시간에 차라리 내 사업을 하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살기엔 제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생각한 전 3주째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올듯 답답함에 미쳐버릴 것 같은 그 기분,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그 나이에 번듯한 회사에 취업했다며 축하해주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는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숨죽이며 지내던 어느날, 지하철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장님, 잘 지내시죠?"

"자기야. 너무 반갑다. 잘 지내지? 거긴 어때?"

"여기도 여전하죠 뭐. 참, 소식 들으셨어요? 김사장님 와이프 돌아가셨대요."

"무슨 소리? 그 분 나보다 어리잖아. 갑자기 왜?"

"못 들으셨구나. 자살했대요. 집 앞에서 차 안에 번개탄 피워놓고 자살해서 남편인 김사장님이 발견해서 경찰에 연락하고 장례식 벌써 치뤘다는데요. 김사장님한테 직접 들은 얘기니까 맞을꺼예요. 연락한번 해보세요."

"...."


김사장은 필리핀에서 돌아온 저희에게 지하철 매장의 일자리를 제공했던 사람으로 그간 일했던 매장들의 소유주였습니다. 필리핀에 가기전부터 사업적으로 남편과 안면이 있었고 그쪽 또한 젊었을 때부터 이런저런 사업을 벌리다 망하기도 여러번, 마지막으로 벌인 두평짜리 지하철 매장의 김밥장사가 대박이 나면서 지금은 스무곳도 넘는 지하철 매장과 공장까지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났던 그의 와이프는 그가 가장 힘들때 만나 가장 큰 도움을 주며 지금의 사업이 있기까지 함께한 장본인으로 저 역시 잠깐이지만 얘기를 나눈적도 있었기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직 한창 나이에 아이도 없었던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문제였으나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 안타까움은 더욱 컸습니다. 사업이 잘될수록 김사장의 사치와 과시욕은 심해졌고 심적으로도 그녀를 많이 외롭게 했던가 보았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잘 나간다며 부러워했던 그들이었기에, 그들 또한 지난날에 참 많이도 고생했다 이룬 결과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 안타까움과 허망함은 더욱 컸습니다.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매장에서 분주하게 일하며 당차게 업무지시를 했던 꽃같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습니다. 


숨막힐 듯한 직장생활과 그녀에 대한 죽음을 얘기할 사람은 남편밖에 없었기에 저희는 다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나 회사 그만둔 거 많이 실망스럽지? 이번엔 어떻게든 버텨볼라 했는데 역시 난 아직도 절박함이 부족한가봐."

"다시 직장생활을 하기엔 넌 이미 너무 멀리 돌아나왔어. 너도 나도 다시는 그 생활로 갈수 없어.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고 네 것을 해."

"김사장 와이프 소식 들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남 얘기인줄만 알았는데.. 그집 우리랑 동네도 같잖아. 돈도 잘 벌고 아직 젊은데 왜 그랬을까?"

"나도 소식 듣고 많이 놀랐어. 그러게 잘될때 좀더 자중했어야 했는데 안타깝네. 김사장 사업도 엉망인거 같더라. 터질게 많은가 봐."

"우리 이제 뭐해먹고 살지? 난 여기 이 도시가 너무 싫다."

"그러게. 뭐든 또 하겠지? 넌 뭐하고 싶은데?"

"우리 제주도 가자. 가서 뭐든 하겠지. 먹고 사는거야 어디든 다 똑같잖아. 여기에 우리껀 아무것도 없는데 사는 곳이라도 우리가 살고 싶은 곳에 가서 살고 싶어."

"너가 원한다면 난 좋아. 그래, 우리 떠나자 제주로.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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