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ly Kenye Kwon Feb 18. 2021

#3. 가치관

- 나의 개성과 세상의 논리를 조율하는 과정

가족, 친구, 직업과 같이 삶의 요소들이 시간에 흐름에 따라 성격이나 중요성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말하고자 하는 게 이 책의 의도였다. 그렇게 우리 삶에서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 있나 살펴보다가 변하는 환경에서 나를 붙들어 주는 건 긴 세월 내 몸에 체득된 ‘나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치관.

사전적 의미로는 ‘가치에 대한 관점’ 이고, 영어로는 ‘가치’라는 단어에도 통하는 ‘values’이다. 왜 한국어에서는 '가치'로 끝나지 않고 '관점'이라는 의미를 굳이 붙였는지 모르겠다. 마음대로 생각하자면 '가치'는 관점과 무관한 절대적인 의미라면 '가치관'은 보다 상대적인 의미가 더해진 것 같다. 정치에 대한 가치, 환경에 대한 가치 등 여러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은 어떤 대의나 사회적 가치를 떠나 온전한 ‘개인의 가치관’을 말하고자 한다.


누군가가 ‘당신의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가치가 있다고 보는것’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피가 끓는 20대 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말한다. ‘돈 많이 벌고 싶어요’,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세상에 적용할 고민 없이 다듬어지지 않은 원초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세상은 젊음에 관대하기 때문에 그런 언급에도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는 외침보다 그것을 세상에 적용하며 살고 있는가에 더 무게가 실린다. 젊은 시절 그렇게 외쳤던 가치를 실천하지 못하고 내내 외치기만 한다면 그것 자체로 공허하고 실없기 때문이다. 40대가 되면 내 생각이 삶에 어느정도 드러나야 한다. 물론 그러기전에 내 삶에 투영시킬 만큼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부터 정돈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자유’였다. 10대때부터 지금까지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은 여전하다. 그 반사적 경향으로 조직에 대한 반감이 너무 강했다.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편견을 받을 까봐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물과 기름 같이 내내 불편한 대상이 ‘조직’이다. 그 때문인지 나는 12년의 학창시절 동안 개근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수십 명이 줄을 맞춰 앉아 있는 것, 일방적으로 선생님을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정해진 시간에 등교를 해야 하는 것 등이 심하게 표현하면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그게 너무 심한 날은 꾀병을 부려 결석을 하곤 했다. 이 거부감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업무의 노고보다 출퇴근의 부담이 더 컸다. 출퇴근 시간이 철저하고 근태관리가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기업은 1년도 다니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게 나의 어떤 명명되지 않은 가치관과 연결되지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조직에 대한 반감은 ‘자유’에 대한 동경에 다른 말이다. 이런 성향은 학습된 것이 아닌 태생적 기질과 연관되다 보니 부지불식 간에, 그리고 나만 감지할 은밀한 순간에 드러난다. 


성인이 되면서 이런 물리적 자유에서 나아가 노동, 돈,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 노동사회에서 ‘자유’는 ‘돈을 벌어주는 일’과 연결되었다. 이에 능력이 있다면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쉴 수 있을 때 쉴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멍키 스패너처럼 말이다. 프리도 레비의 소설 ‘멍키 스패너’를 보면 자유를 갈망하는 ‘티노’라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는 선천적으로 있는 손기술을 살려 여러 나라를 돌면서 일할 수 있는 선박 수리 기술자가 된다. 지금으로 치면 계약직 형태 같은데 선박 회사와 계약을 맺고 해외 현장으로 파견을 나가 몇 달을 보내며 돈도 벌고 그 나라 문화도 체험한다. 그렇게 여러 나라를 돌지만, 현장이 반복된다 싶으면 선박 회사를 바꿔 계약해 파견 나라를 넓혀간다. 그런 그에게 ‘기술’,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핵심 연장인 ‘멍키 스패너’는 ‘자유’와 ‘노동’이 은밀하게 섞인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자신만의 무기인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주인공이 그 많은 일들 중에서 왜 ‘선박 수리공’을 선택했는가 이다. 단순히 뱃사람처럼 여러 나라를 유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리하는 것을 좋아했고 잘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티노를 키운 이모들은 티노의 ‘황금 같은 손’을 기억한다. 


“언제나 그랬어요.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수도 꼭지가 새거나, 재봉틀이 고장 나거나, 라디오가 고장 나면 티노가 모든 것을 순식 간에 고쳤어요.”


한번도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난 적 없는 이모들은 객지 생활을 하는 '티노'를 걱정하면서도 어릴 적 재능이 직업이 된 그를 자랑스럽고 내심 부러워한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나는 계속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노동은 나를 자유롭게 해 주지만 그 대가를 치른답시고 내가 원하지 않고 맞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모든 것에는 ‘나의 가치와 기질’이 기저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12년의 마케팅 리서치 경력이 있다. 소비자를 관찰하고,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은 ‘내가치와 기질’에 잘 맞는 일이었다. 이것은 ‘자유’와 동급으로 볼 정도이다. 퇴사를 반복하면서도 업계를 떠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고 업계의 흐름이 바뀌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인사, 매출 같은 관리 업무가 늘어나고 트렌드에 맞게 새로운 분석법을 개발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형태의 일은 줄어들고 나의 기질과 무관한 업무들이 중심을 이뤘다. 나의 멍키스패너는 녹이 슨 것이다. 

동시에 개인적 삶에서 요구하는 것도 생겼다. 바로 ‘책임’이다. 주구장창 ‘자유’를 주장한 나에게 ‘책임’은 ‘나 자신에 대한 책임’ 뿐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나 혼자 먹고 살 수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낚싯줄 같은 관계는 생각보다 많았다. 자식으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나를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관계 안에 ‘책임’이 있었고 실재하는 줄도 몰랐던 그것은 마흔을 넘어가며 무게를 키워 점점 나를 눌렀다. 

세상은 다른 역할을 기대하고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자유와 노동의 균형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젊은 시절의 가치관을 수정할 시점이 된 것이다. 믿어 의심치 못할 내 소중한 가치인 자유와 세상에서 요구하는 책임. 완전히 반대되는 이 두 개념 앞에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둘 중 어떤 것을 버려야 하나’ 였다. 

20대 대학 진학 후 나는 용돈을 번다는 핑계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졸업 후 취업도 하지 않고 1년의 백수생활을 했고, 그 이후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원에 갔다. 졸업 후 큰 기업, 작은 기업에 몇 개월을 다니다 우연히 접한 마케팅리서치 일을 하겠다며 아주 작은 회사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어학 연수를 이유로, 여행작가로 살겠다는 이유로 경력을 쌓아야 하는 시기에 퇴사를 하고 원하는 일들을 했다. 이정도면 자유롭게 산 편 아닌가. 이제 세상에 안착해 책임을 다하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며 착실하게 살아갈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가치는 성욕이나 배고픔처럼 한 때 결핍을 채워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라는 가치는 유년기를 지내며 마음 속 끌림으로 선택한 것이다. 세상이 만만치 않고 내가 주변과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포기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내 본질 즉 ‘나의 자아’와 맥이 닿아 있는 소중한 개념인 것이다. 15년 간 14번의 퇴사, 여행작가와 마케팅 리서치의 핑퐁 같은 경력 같은 설명할 수 없는 행보는 ‘자유’라는 가치에 충실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내 인생에 각인되고 말았다. 그것을 마흔이 넘었다고 뿌리 뽑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임은 어찌할 것인가. 계속 모른 채 하면 될까. 지금 돌이켜 보니 젊은 시절 누린 자유는 내가 온전히 그러할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보살핌, 내 경우 언니들과 부모들의 이해와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을 알아 챈 이상 더 이상 외면은 어려울 것 같다. 심지어 나의 ‘자유’를 인내해 준 사람들이 늙고 약해졌다. 나의 보살핌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시간이 흘러 서로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복잡하고 무거운 현실 속에 삶의 가치를 적용하는 건 쉽지 않다. 적용을 하기에 세상은 너무 나와 무관한 속도와 방향으로 흐른다. 하지만 그만큼 휘몰아치는 일상이기에 나의 가치는 더 소중하다. 그 위에 올라 탄 시간은 세상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못할 ‘가치’를 정리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결국 ‘나의 삶’을 사는 것일 테다. 많은 희생과 타협이 요구될 것이다. 버킷리스트처럼 묵혀두는 가치는 중요할 때 그 역할을 하기 어렵다. 대신 가치를 정하고 가지치기를 하면서 유연하게 개념을 정교화 하는 게 필요하다. 나 역시 자유와 책임을 가져갈 삶을 다듬는 중이다. 물론 살다보면 이 외의 다른 변수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중이 줄고 형태가 바뀔지언정 중요하게 지켜야 할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는 잊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 15년 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지 않은 적이 없다. 일기, 노트 등 곳곳의 메모를 들춰보는데 모든 글이 지금의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꾸준히 규정해 온 것이다. 물론 현실적 기준으로 볼 때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내 가치가 견고함을 확인했기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가치관의 정립은 이런 힘을 준다. 나와 무관하게 흐르는 세상에서 내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 그리고 발로 다진 길이 '나의 길'임을 확신하게 하는 힘 말이다. 결국 현실이 무겁지만 결국 그 현실은 내 삶 안에 있는 것이다. 

이전 03화 #2. 우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