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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Kenye Kwon Feb 16. 2021

#1. 가족

싱글에게 가족은 누구일까

나의 가족은 7명의 대가족이었다. 이 정도면 대부분 3대가 살기 마련인데 나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 두 분과 5명의 딸들로 7명의 대식구가 구성되었다. 3대 독자인 할아버지, 그 집안의 장남인 우리 아버지에게 아들은 꼭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딸 5명을 낳으셨고 아들에 대한 미련은 결국 포기하셨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다행히 눈치나 억눌림 없이 자랐다. 다섯번의 실패 후 마음을 정리하신 덕인지 아들에 대한 아쉬움을 나에게 드러내지는 않으셨다. 시집살이 속에도 자식만은 잘 키워보겠다는 엄마의 노력과 아빠의 책임감 덕분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유지되었다.

그렇다고 화목한 것은 아니었다. 예민하고 쉽게 상처받는 엄마는 자주 아팠고, 인자하지 못한 아빠의 성품은 집안을 내내 살얼음판으로 만들었다. 가장 큰 언니와 11살 차이가 날 정도로 부모님은 나이가 많으셨고 여느 친구들의 부모님들보다 늙어 계셨다. 연세도 많았지만 성품 자체가 아빠는 우리에게 무심했고, 엄마는 언제나 삶의 노고로 고달팠다. 언니들과 소소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부모의 빈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했다. 나이 들고 고달픈 부모와 충분히 교감을 나누지 못한 나는 언제나 약간 쓸쓸했던 것 같다. 

이 영향인지 나는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내 편은 없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다. 설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를 함부로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이기적인 일이고, 동시에 나는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울 때마다 발현되는 언니들과 연대감은 내 마음을 데워 주웠지만 그것이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혼자가 편했고, 20대에 이르러서는 친한 친구, 애인처럼 ‘내 편’의 누군가를 만드는 일은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일이라고까지 여겼다. 즉 나에게 의미가 있든 없든 어떤 타인과의 관계는 책임지우지 않고 책임을 묻지 않는 쿨 한 관계로 남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이런 생각의 정점은 바로 독립이었다. 매일같이 자정에서 새벽까지 야근을 할 정도로 직장생활이 고달팠었다. 그런 내가 걱정되었는지 엄마는 내가 귀가할 때까지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었다. 매일 선잠을 주무시고, 빨래를 해 주고 식사를 챙겨주며 내 수발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몸이 약한 엄마는 그 피곤이 그대로 드러났고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불편했다. 엄마는 힘에 부치는 자식 돌봄을 하고 있었고, 그걸 보는 나는 부채의식으로 괴로웠다. 서로에게 쿨 한 관계이고 싶었는데 지금은 서로에게 독이 되는 관계가 되는 듯 했다. 몇 달간 고민을 하고 부모님과 가까운 동네에서 살겠다는 조건으로 독립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그동안 불편함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서운해 하셨다.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그건 당신이 불편을 ‘불편’이라고 인식하지 못한 무감각이지 나에 대한 애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매주 토요일 아침 식사를 같이 한다는 조건으로 독립 허락을 받았다. 


‘부모와 적당한 거리두기는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35세에 독립을 했다. 본가에서 5분 거리의 작은 오피스텔이었다. 10평도 되지 않은공간은 진정으로 스스로 살아남기를 시도해 볼 시험장이었다. 동시에 감사함과 뭉근한 갑갑함이 공존하는 ‘부모’와 ‘쿨 한 관계’로 재설정 할 수 있는 첫 시도였다. 그런데 그 쿨 한 관계는 생각보다 빨리 자리 잡혔다. 5분 거리이니 자주 드나들자던 서로의 약속은 한달만에 흐지부지 되었다. 전화가 뜸해지고, 매주 토요일 가던 것을 몇 번 건너뛰어도 별 말씀이 없었다. 진정한 독립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이 자유에 심취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계약한 출판사가 내부사정으로 휴업을 하면서 일년 간 쓴 원고가 붕 뜨게 된 것이다. 고민을 하다가 1인 출판으로 출간하기로 했고, 바쁜 업무 특성상 회사일과 출간을 병행할 자신이 없어 퇴사를 해 버린 것이다. 회사에서도 휴직을 권했지만 나는 퇴사를 강행했다. 갓 독립하여 맛본 자유가 너무 달콤해,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심취해보자는 욕심이 든 것이다. 아마 부모님 댁에 살았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결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은 모르는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고, 오래도록 들키지 않을 정도로 부모님은 내 생활 반경에서 멀어졌다. 착실히 알아본 만큼 출간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출간 준비가 거의 다 되고 인쇄를 맡길 즈음 대상포진을 앓고 말았다. 경력단절을 감행하며 진행한 출간 준비, 부모님 모르게 백수로 지내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 쌓였던 것이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잠들 때까지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계속되는데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5분 거리에 부모님이 살고 있지만 비밀 퇴사 중이었으니 연락할 수가 없었다. 친구와 지인들은 모두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상황이 특별했지만 사실 삶의 공간에 혼자라면 나는 철저히 혼자인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앓다가 죽으면 나는 며칠만에 발견이 될까”


이날 절감한 ‘인생은 처절하게 혼자’라는 느낌은 나에게 깊게 남았다. ‘쿨 한 관계’, ‘가족과의 적당한 거리’를 주장해왔지만 막상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와 함께했으면 하는 사람, 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러한 과정으로 배우자를 만나고 주체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가족을 만든다. 내 기호와 성향이 반영된 가족이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생하는 희로애락을 겪으며 삶의 연대감과 동지애로 단단해 질 것이다. 운명적으로 결정된 부모의 양육으로 성인이 되고, 나의 선택으로 새로운 가족을 만들게 된다. 

싱글인 나에게는 후자의 가족이 부재하다. 동시에 삶의 무게는 커지고 쉽지 않은 결정들을 계속 마주한다. 이럴 때 아무 계산이나 부담 없이 논의하고 조언을 구할 대상이 없다는 것에 힘이 빠진다. 30대 후반까지 나는 어떤 결정이 막힐 때에는 습관처럼 엄마를 찾았다.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우선인 엄마는 언제나 나의 응석 어린 하소연을 잘 들어주셨다. 그러나 엄마의 포근한 위안을 받을지 언정 진정한 공감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회사 스트레스, 소진되는 것 같은 불안감은 엄마가 공감하기엔 너무 거리가 먼 이슈였다. 


마지막 퇴사를 하기 전 나는 우울증을 겪었던 4년전의 상태가 되었다. 무기력하고 삶의 의욕이 전혀 없었다. 내 얘기를 속 시원히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나는 4년전부터 다니곤 했던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비용을 내고 확보한 그 시간은 그나마 상대에 대한 미안한 없이 내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개인감정 없이 무미건조하게 해 준 상담도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뿐이었다. 내 불안한 심리상태가 드러날 게 두려워 친구들과 약속도 자제하고 본가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그렇게 내 안으로의 고립은 더 깊어만 갔다. 

엄마는 육감적으로 내 상태를 감지했는지 몇 주에 걸쳐 집에 오라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일요일 오후 늦게 본가에 갔다. 괜찮아 보이도록 연기를 하고, 식사만 하고 오면 될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복날을 챙겨주지 못했다며 삼계탕을 끓여 내셨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원망과 슬픔이 밀려왔다. 나에게 하나도 필요하지 않은 삼계탕을 자꾸 먹으라 하는 엄마가 원망스럽고 갑갑했다.


“나를 왜 이렇게 낳았어!” 

결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엄마는 분주한 손짓을 멈추고 자리에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왜 이렇게 힘들 때 마다 정신과에 가고 약을 먹고, 그러다 힘들면 퇴사하고… 왜 나를 이렇게 나약한 정신상태로 만들었냐고!”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burn-out과 우울증, 그리고 퇴사를 반복하는 내가 너무도 초라했다. 그리고 나는 그 화살을 엄마에게 돌렸다. 내 외침이 멈춘 뒤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힘들면 그만 두어라. 네 몸이 우선이다”


혼자 감당할 인생에서 미래는 고려하지 않은 위로였다. 나는 다시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세상에 나를 내어주고, 성인의 몸으로 키워준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이상도 이하도 없는 것이었다. 부모의 관심은 자식의 육신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나는 더 상실감을 느꼈다. 내 주변 어디에도 공감해 줄 이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 같았다. 


“그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야?”


결국 나는 나오는 대로 말하고 삼계탕은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은 마치 동굴 같았다. 진흙탕과 오물이 뒤엉킨 동굴이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망가진 상태, 더 이상 방치하면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다음날 퇴사를 감행했다. 

이 역시 섣부른 행동이었다. 회사가 고통을 보탠 것은 원천적 원인은 아니었다. 회사의 스트레스, 매일 바쁜 일상들을 감당하면서도 살아가야 할 당위성을 찾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살필 자녀와 가정이 부재한 것이 공허함으로 작용했고, 내가 일하지 않으면 힘들어지는 타인은 없을지 언정 내 삶이 위태롭다는 것을 가볍게 여겼었다. 이것을 감지하지 못한 나는 습관처럼 부모에게 기댔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니 불안한 나를 자극한 대상을 잘라버리는 결정을 해 버린 것이다. 

싱글이 삶의 무게를 마주했을 때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는지 몰랐다. 당연하게도 엄마 역시 전혀 알 수 없었다. 자식이 나이가 들면서 부모와 교류할 수 있는 감정의 결은 달라진다. 예전에는 여러 인생의 조언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더 이상 그럴 수만은 없게 된다. 삶의 당위성, 나를 잡아주는 어떤 끈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스트레스와 두려움은 내 몸과 마음을 쉽게 휩쓸었다. 

당연히 퇴사 후가 더 심각했다. 우울감과 신경안정제의 복용으로 신체 리듬은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수순대로 살지 못했고 스트레스에 굴복했다는 패배감은 계속됐고,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부모는 생각보다 더 늙어 있었다. 습관처럼 기댔던 존재는 오간데 없고 보호를 바라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내 가정’이 없는 나는 감정의 보급처가 없는 상태에서 핏줄의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책임만 지게 되었다. 이 상황은 진즉 시작됐고 육감적으로 느끼기도 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대상포진을 앓았을 때 느낀 ‘혼자’라는 느낌이 현실로 다가왔다. 인정했다고 하지만 핏줄의 가족에 대해 애증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부모의 늙음이 부담스러웠고, 인생의 사이클을 함께 하는 이가 없어 혼자 달려야 하는 외로움은 깊었다.


싱글에게 가족은 어려운 개념이다. 어릴 적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만 적정한 시점에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은 물리적이기도 해야 하고, 심리적이기도 해야 한다. 게다가 그 과정은 일방적이다. 정작 독립의 실 대상인 부모는 이런 과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양육자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거두고 오롯이 서야 한다. 동시에 그들을 돌봐야 하는 부담도 짊어져야 한다. 나 혼자의 삶도 어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전도된 역할 관계를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마치 길을 잃은 강아지와 같다. 


어느 날 본가에 찾아간 나는 평소처럼 밥을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유독 그날 따라 엄마는 의기소침한 어투로 지난 번 가져간 반찬은 남았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같은 단조로운 얘기만 하셨다. 


“엄마는 왜 계속 그런 얘기만 해? 오랜 만에 봤는데 다른 할 얘기 없어?”

엄마가 가만히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해도 되나?”

“그럼”

내 대답에 1초도 안 되어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말할게. 나는 네가 언니 생일날 문자 한통 보냈으면 좋겠다”

4명의 언니 중 한 언니가 사소한 오해로 다른 형제들과 연락을 안하고 지냈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언니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자매들의 축하를 못 받을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언니에게 문자해라’라는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막내 딸은 너무 커져버렸다. 당신이 도와줄 수 없을 정도로 자식의 삶은 복잡하다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고 힘든 삶을 사는 자식에게 도움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 작은 부탁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엄마, 엄마는 계속 우리 자매의 엄마야. 엄마이니까 하시고 싶은 말씀 다 해도 돼.”

“그래도 되니? 나는 이 말 하면 네가 싫어할까 봐”  


퇴사 이후 삶의 무게는 더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회사에 있었을 때 만큼이나 무겁고,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꽤 고군분투를 해야 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생각은 더 분명해졌다. 부모는 나에게 더 이상 어떠한 현실적인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나를 바로 서게 한다. 아마도 진작에 감지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부모는 내 아이, 내 남편처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나의 책임이 생겼을 뿐, 그것이 여전히 나의 당위성을 만들어줄 수는 없다. 여기서 오는 공허함은 오히려 삶의 본질을 찾게 해 준다. ’00 때문에 산다’ 라는 문장의 명사를 스스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늙어가는 부모는 나에게 인내와 지혜를 요구할 것이다. 늙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는 일, 알수 없는 시점까지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주도권이 바뀐 관계를 부모가 부끄럽지 않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내 현명함이 요구된다. 그러면서 나는 어른이 된다. 부모는 정말 끝까지 그렇게 자식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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