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할 용기, 실패를 견딜 용기, 같은 자리에 머물 용기
‘용기’란 무엇일까. 미지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 정의를 대변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불의를 참지 않는 것 등을 우리는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한다. 이런 용기 있는 행동이 나올 법한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소시민. 시민 사회를 이루는 대표주자임에도 스스로를 ‘소시민’이라고 일컫고 ‘밥벌이’에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자조적인 얘기도 스스럼없이 한다. 매일 짜인 삶에서 맡은 본분의 역할을 하고, ‘무탈하게 사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우리는 어쩌면 함부로 ‘용기’ 부리는 상황을 부러워하거나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용기’라기보다는 상황을 바꾸는 판단을 주저 없이 하는 편이다. 어릴 때로 거슬러 가면 고등학교 2학년 문과와 이과 결정을 할 때 문과에 신청한 뒤 2월에 담임을 졸라 이과로 변경을 했다. 그렇게 이과로 대학을 입학해서는 자퇴를 한 뒤 재수를 해 문과로 입학을 했다. 이후 입사를 했지만 초반의 2곳은 6개월을 넘게 다니지 못했다. 지금의 경력인 마케팅 리서치는 대학 교수님의 소개로 아르바이트 직군으로 들어간 작은 회사에 인턴사원으로 눌러앉으면서 시작이 된 것이다. 규모나 대우 측면에서 이전에 그만둔 회사보다 훨씬 부족했지만 나와 적성이 맞다고 판단해 정착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무언가 지금의 길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주저 없이 ‘멈춤’을 선택했다. 영국 연수와 쿠바 여행 같은 개인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심각한 남녀차별이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조직 분위기 등의 이유로 회사를 11번이나 퇴사했다. 이런 결정은 내 인생에 가장 충실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경로를 바꾸고 나와 잘 맞는 요소가 확인될 때까지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그로 인한 비용과 시간은 엄청났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한번뿐인 인생을 마음에 드는 상황으로 채우고 싶었고 그것을 찾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은 전혀 아까울 게 없었다. 이런 행보에 공통된 반응은 ‘용기 있다’였다. 그리고 나도 내가 용기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의 퇴사 결정에서 그 ‘용기’에 대해 내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연간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여러 명의 팀원을 관리하고 클라이언트를 응대하면서 프로젝트 성과도 내야 하는 위치였다. 기존 나의 경력과 전혀 무관한 프로젝트였지만 근성으로 버텨온 덕분에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객사의 기대치는 높아졌고 새롭고 창의적인 결과를 요구했다. 스케줄을 바쁘게 흘렀고, 계약 당시 없었던 요구도 늘어만 갔다. 동시에 내 능력 밖의 프로젝트라는 생각은 강해졌다. 자신감은 하락하고 외부의 요구는 높아만 갔다.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하기 힘들 정도의 압박이 있었지만 책임자로서 프로젝트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근무시간에는 신경정신과 약과 커피로, 퇴근시간은 술로 버티는 나날이 이어졌다. 절대 정상적일 수 없는 상태였는데 그것이 감지되었는지 팀 분위기는 금세 와해되어 갔다. 작년부터 함께하면서 서로의 생일도 챙기고, 퇴근 후 소소한 술자리도 가질 정도로 친근한 편이었는데 PM이 중심을 잃으니 팀원들은 빠르게 지쳐갔다. 고비마다 아이디어를 내고 협력하던 분위기도 각자 일에만 몰두하는 태도로 바뀌어 갔다. 나에게 이 분위기를 끌어올릴 힘은 전혀 없었다. 고객사의 요구, 어지러운 업무분장, 팀원들의 불만이 뒤섞여 아수라장 같은 나날이 반복되었다. 결국 나는 1개월의 휴직과 프로젝트를 바꿔주겠다는 모든 제안을 거두고 결국 프로젝트 도중에 퇴사를 하고 말았다. 정상적인 생활을 못한 나를 보아온 주변에서는 잘 한 결정이라고 해 주었다. 나도 나를 위한 용기를 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상황을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만 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한 대부분의 결정이 그러했다. 팀장이 여자라고 차별할 때 혹은 조직이 잘못된 결정을 할 때 나는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 상황을 주저 없이 벗어났다. 그리고 그 결정을 스스로 ‘용기’라고 여겼다. 이번에도 이 퇴사는 건강과 자존심을 지키는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용기 있을지 몰라도 함께한 이들에게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팀원들과 관계는 퇴사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퇴사 후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찝찝하고 썰렁하게 끊긴 관계 앞에서 내 결정을 곱씹어봤다.
지금까지의 결정은 무엇이었을까. ‘용기’라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과 결합될 때도 있고 한편으로는 인내하는 마음과 결합될 때도 있는 것 같다. 내가 결정할 때 여긴 건 내 인생에 충실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는 주변에 피해를 남기기도 하다. 마지막 퇴사를 돌아보면 그것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상황에서 도망친 것이었고, 남아있는 이들에게 배신감을 남겼다.
용기 vs. 용감 vs. 무모함…
혼용될 수 있는 이 단어들을 구분하자면 지속성과 책임감이 아닐까 싶다. 용기는 내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실패의 상황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용기일 것이다. 용감은 짧은 시간에 일어날 두려운 상태를 극복하는 순간의 에너지와 비슷하다. 무모함은 이 두 가지와 무관한, 어쩌면 순진무구한 충동 감에 가까울 수 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각 용어가 사용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면 그렇게 터무니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긴 고통을 감내해도 대의와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두고 용기 있다고 할 것이다. 반면 공포스러운 상황을 견디는 걸 용감하다고 한다. 어떤 일을 무턱대고 시작하거나, 그 뒤에 따르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할 때 무모하다고 할 것이다.
무모해도 되는 나이, 용감해야 할 순간들, 그리고 용기가 필요한 나이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용감은 구분될 수 있지만, 용기와 무모는 새로운 시도를 전제한다는 면에서 헷갈리기 쉽다. 나의 20대와 30대는 무모와 용기가 섞였었다. 소신에 충실한 결정이었지만 그 뒤를 책임질 만큼 강하진 못했다. 이때는 그러한 trial & error를 용인할 만한 젊음이 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의 무모함은 감당하기에 힘이 부친다. 회복하는데 드는 에너지도 부담스럽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결정과 변화를 삶에서 점점 밀어낸다. 동시에 그동안 삶의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인다. 나의 경험이나 주변 경험까지 모조리 모아 데이터베이스가 장착되고 나면 어떤 시도나 가능성은 가상의 위협과 불확실성에 깎여 의해 금세 포기된다. 물론 이런 데이터베이스는 우리에게 신중함을 준다. 같은 실수를 줄이게 해 주고 노련한 해결책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에 관계없이 그 데이터 베이스에 크게 의존한다.
하지만 세상은 정지상태가 아니다. 과거에 쌓인 데이터만으로 결정하기엔 불확실하고 어려운 일들이 넘쳐난다. 신중해야 할 때와 과감해야 할 시점은 항상 섞여 있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 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20대의 혈기를 빌려 무모할 줄만 알았던 우리들이 조금 더 건설적으로 삶을 꾸리는 데 필요한 덕목이다. 평균 수명을 산다고 할 때 마흔은 삶의 중간이다. 시작하기에 실패 후 회복이 염려되고, 20~30대의 경험만으로 살아가기엔 무료하고 아쉬움이 든다. 무언가를 하기에도, 하지 않기에도 애매한 시점에 나이만큼 쌓인 신중함과 파생되는 두려움이 뒤섞여 여러 시도를 상상만 하다 멈추고 만다. 그럼에도 간혹 불혹의 용기를 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공부를 시작하거나,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는 식이다. 그들의 시도는 가정의 희생과 그동안 쌓은 자산을 담보로 건다. 위험한 용기일수록 노력은 커지게 된다. 좋은 경우만 기억될 수도 있지만 용기를 낸 사십 대의 노력은 대부분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책임과 불안을 무릅쓴 용기와 그로 인한 성취는 분명 후반기 삶에서 내적인 활기가 되어 줄 것이다.
그렇다고 40대의 용기가 새로운 시작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신중함으로 하려던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용기이다. 즉, 어릴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20대와 다른 40대의 용기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어떤 시도를 할 때는 현재의 상황이 불만스러운 경우일 때가 많다. 뭔가 불편하거나 아쉽기 때문에 다른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럴 때 여러 고민 후 계획했던 시도를 멈추고 잔류한다는 건 현재의 괴로움과 단점을 모두 수용한다는 다짐이 깔려 있다. 이것이야 말로 대단한 용기이다. 마치 알고 있는 불구덩이에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이런 용기가 없었다. 그 괴로움에 벗어나는 결단만 있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 그것은 지나치게 감정에만 충실했던 것이고, 타인과 함께 삶을 엮지 못한 이기적 결정임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퇴사 후 밀려오는 후회와 헛헛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40대의 용기는 무엇을 하던, 하지 않던 요구되는 것 같다. 깊은 고민과 자신만의 가치관이 전제되어 있다면 어떤 방향이든 그것은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전제로 무모함과 타성이 구분될 것이다. 시도할 용기와 참아야 할 용기를 구분하는 건 온전히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가치관이 중요하고 삶의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나부터 돌아보고자 한다. 많은 경험으로 지혜와 노하우가 생겼겠지만 동시에 파생된 나만 기억하는 바보 같은 결정도 찌꺼기처럼 끼어 있다. 이 혼재된 기억을 안고 주변의 책임과 내적인 욕망을 고려해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나답게 살아가는 길은 용기를 잃지 않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무언가를 선택할 용기, 선택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 반면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 용기. 그 어떤 용기도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