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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Kenye Kwon Feb 28. 2021

#8. 외로움

- 완벽한 혼자임을 인정하게 될 때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PM(Project Manager)들이 많았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겪는 고충이 비슷하다 보니 가끔씩 마음 맞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며 어려움을 토로하고 위로도 해주기도 했다. 퇴사하기 몇 달 전 스트레스와 고민이 많았던 나는 그들 중 몇 명을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어차피 입장이 다르기에 어떤 답을 기대하기보다는 내 안에서 맴도는 고민을 밖으로 툭 뱉어 객관적으로 보고 싶기도 했다.

당시 나는 연간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건사고가 계속 반복되었고 그 뒷수습도 바쁜데 성과에 대한 챌린지도 심했다. 이미 이런 고단함을 알고 있었던 PM들은 내 얘기를 천천히 들어주었다.


“맞아요. 나도 연간 프로젝트하잖아요. 정말 일 년 내내 지치지 않고 성과를 내는 건 어려운 거 같아요”

한 PM분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죠? 저만 예민한 거 아니죠? 정말 부담도 되고 지쳐요”

“맞아. 그래서 컨디션 관리가 정말 중요해요”

“그런데 사고 한번 나면 전 멘털이 사라져요. 여기저기서 계속 메신저 오고 결국은 모두 제 책임이고... 부장님은 그런 일 생기면 어떻게 극복해요?”

“나도 한번 사고 난 적 있었죠. 그런데 일단 급한 거부터 막고 욕하면 그냥 욕 듣고 그러죠”

“너무 자존감 상해요…”

“그래서 집에 와서 속상한 얘기 하죠. 남편한테 얘기하면 들어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조언해주기도 하고. 이번에도 사고 났을 때에 정말 멘털 관리하기 힘들었었는데, 남편이 객관적으로 얘기해줘서 좀 정리가 되었어요.”

“아….”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빼고 그들은 모두 기혼이었는데 다들 회사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집에 돌아가 남편과 상의를 한다고 했다. 갑자기 뭔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퇴근하면 텅 빈 집이 맞아준다. 유독 크게 들리는 냉장고 소리, 온기가 없는 소파, 그리고 내가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절대 밝아지지 않는 빈 방이 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복기하거나, 편의점 맥주를 마시며 ‘잊자, 잊어’를 외쳤었다. 힘이 조금 있는 날은 기운을 차렸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씻지도 못하고 한두 시간은 멍하니 누워만 있었다.


하루의 노고는 그대로 빈 집으로 들어왔는데 하루를 다 살아낸 나에게 그것을 털어낼 힘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줄 이도 없었다. 도와주는 것은커녕 시체 같은 나를 자극할 그 무엇도 없다. 사적인 공간에서 나는 완벽히 혼자가 된다. 20대에는 소통의 대상이 많다. 친구들과 사회에서 겪은 일들, 개인적 고민들을 공유하면서 우정을 더 쌓아 간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갈수록 친구라 하더라도 인생의 어려움이나 스트레스를 터 놓기가 조금씩 부담스러워진다. 삶의 공통분모가 적은 친구라면 더욱 그러한데, 기혼의 친구에게 회사 스트레스를 얘기할 수 없고, 그 친구 역시 육아의 고충을 미혼인 나에게 말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일상적 고충은 감당할 정도로 맷집이 생긴 것도 있지만, 아무리 친구라지만 좋지 않은 얘기를 꺼내는 게 미안하기도 하다. 미혼의 친구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고단함이 비슷할 텐데 퇴근 후 회사 스트레스를 시시콜콜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이렇게 혼자서 그럭저럭 버틴다지만 스트레스의 크기가 커질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기혼인 친구들은 삶의 괘를 같이하는 배우자와 논의를 하든 가족에 대한 책임이든 마음을 잘 잡는 것 같다. 결정은 본인이 한다지만 가족을 통해 위안을 받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혼자 사는 이에게 스트레스를 감당할 명분이 별로 없다. 싱글의 큰 어려움은 인생의 무게를 논하고 위로받을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머릿속에서 맴도는 고민을 지나가는 대화의 소재로 올리면 별일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언니들의 조언이 많아서인지 어떤 결정 앞에서 그 길을 먼저 간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경험담에 많이 의지한 편인데 결국은 내 의지보다는 그들의 말에 근거해 정답이라 여겨지는 길을 선택해왔다. 그렇게 한 결정은 결국 나에게 많은 실패를 남겼다. 당연한 것이 조언은 자신의 경험과 배경에서 나온 것이지 나의 성향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갈래길에서 모든 결정과 책임은 오롯이 내 몫이고, 그 몫을 감당하는 게 '내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이제야 내가 나 자신과의 소통에 소홀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내가 나를 잘 알았다면 회사에서도 내가 수용할 수준과 거부할 수준을 잘 구별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혼자 살게 되면 힘이 두 배는 강해야 한다. 삶의 스트레스, 경제적 부담, 미래에 대한 고민... 이 모두 오롯이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기혼이라 해도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 그 무게가 두 배 세 배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가능한 얘기이다. 하지만 가족을 책임지려는 자의 에너지 역시 가족이 주는 것이고 그것이 삶을 밀고 나가게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의 가장 불안한 구석이 이 점이다. 삶에 대한 목표, 당위성이 실낱같이 가볍고 헛헛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붙들어 줄 현실이 없다. 물론 사랑하는 부모님과 언니들, 친구들이 있지만 혼자서 일상을 살아갈 때 문득문득 올라오는 공허함은 어쩔 수가 없다.

최근 5년 간 나를 짓눌렀던 무기력과 우울감은 여기서 나온 것 같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게 두려워 명상, 요가, 철학 공부, 심리상담 등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건 다 했었다. 마치 숙제처럼 스케줄을 정해 성실히 했지만 존재의 공허함만 더 커졌다. 내 삶이 완벽히 혼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은 조금씩 인정한다. 내 삶의 길에 온전히 나 혼자 서 있다는 것을. 약속을 잡지 않으면 평생 밥을 혼자 먹어야 하고, 기쁜 일이 생겨도 상대방의 시간이 안되면 혼자서 좋아할 뿐 축하받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방송인 홍석천 씨는 생일 때 가능한 많은 지인을 초대하고 유독 크게 파티를 한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결혼이며 출산을 축하해주는데 자신은 축하받을 일이 1년에 딱 한번 생일뿐이기 때문이란다. 진행자와 게스트들이 우스갯소리 마냥 웃었지만 나는 그 말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음을 느꼈다. 세상의 많은 예절과 규칙은 기혼에게 맞춰져 있다. 나이의 흐름에 따라 그것을 따르다 보면 그 셈법이 미혼자에게 맞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름의 교정의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쓸쓸한 일이다.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가치 있는 삶으로 이어나가려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일상을 살다가 문득 찾아 올 공허함에서 빠져나오고,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일상에 활기를 유지하려면 남들보다 두배라고 여길 정도의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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