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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Kenye Kwon Feb 27. 2021

#7. 직업으로서의 일

– 자신만의 자유로운 멍키스패너를 가질 수 있기를

What I like to do

What I can do

What I become


좋아하는 일(like)과 할 수 있는 일(can) 중 어떤 것을 직업(become)으로 선택해야 할까.

이 논의는 오랫동안 지속되지만 우세하는 쪽이 번복되는 걸 보면 뚜렷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도리어 자신의 관심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유망한 직업(become)을 먼저 정하고 그것에 매진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일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고,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은 변화된다. 우리 삶에 직업만큼 광범위하고 직업적으로 연결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은 나의 현실적 생계와 직결된다. 동시에 개인차는 있겠으나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 직업은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나에게 직업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인생의 전부였다. 나의 꿈을 실현해주고, 내가 열정을 바칠 수 있는 대상. 그 꿈이란 대책 없이 보이겠지만 '순수하고 공정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무엇이 되고 싶다’ 같은 구체적인 직업군은 없었다. 다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기 보다는 ‘글을 써서 세상에 옳은 말을 하'고 싶었고, ‘마케팅 리서처가 되어야겠다’ 보다 ‘시장조사로 소비자 의견이 기업에 반영되어 서로 좋은 제품을 만들게 하'고 싶었다. 직업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발전적인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졸업 후 무엇을 할지 막막한 건 당연했다. 그나마 PR 학 전공을 살려 들어간 PR 대행사는 3개월 인턴을 마치자마자 바로 퇴사를 했다. 하루 20시간 노동이 문제가 아니었다. 기자에게 뉴스 제공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안 좋은 점은 감추고 좋은 점을 강조한 보도자료를 드미는 일은 이데아적 직업관을 계속 괴롭혔다. 그 뒤 대학원 전공 때 막연히 생각했던 NGO를 결심했고 1년간 준비를 해 꽤 규모 있고 평판이 좋은 NGO에 입사를 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사소하지만 자주 발생하는 불공정과 불합리는 존재했다. 그곳에도 나의 파랑새는 없었던 것이다. 6개월 만에 퇴사를 하고 시간은 점차 흘려보내면서도 나의 직업관을 수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교수님의 소개로 들어간 작은 마케팅 리서치 회사에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했고, 입사제의를 받아 내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은 규모의 회사였지만 대기업을 고객사로 두면서 꽤 큰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었다. 마케팅 리서치라는 분야가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이기에 모든 과정에 논리와 타당성이 깔려 있어야 했는데, 이런 점이 꽤나 공정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결과 보고서가 반영되어 좋은 제품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소비자 - 기업의 선순환에 일조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안의 파랑새가 처음으로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4대 보험 없이 프리랜서 형태이고 주 60시간이 넘도록 일하는 악조건이었지만 3년 가까이 정말 재미있게 다녔고 이 일은 내 경력으로 서서히 정착했다.

이후 계획한 어학연수를 다녀와 조금 큰 규모의 마케팅 리서치 회사에 입사를 했다. 나의 경력이 조금씩 쌓여갔고 나의 파랑새를 훨훨 날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파리에 본사가 있는 글로벌 대행사였다. 보수적이지는 않았지만 의사 결정에 윗선의 개입이 많았다. 게다가 매출의 부담이 있으니 수익성이 낮고 난이도가 높은 프로젝트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다. 무엇보다 동시에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했기에 보고서의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의미 있는 분석 결과로 소비자에게 발전된 서비스와 제품이 돌아가게 한다는 나의 이상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회사 목표를 위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그것을 해 내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의 파랑새가 죽어간다는 게 감지되면서 불안함과 조급증이 일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불공정과 부당함에 반응하는 것뿐이었고 그럴수록 나는 민감하고 까탈스러운 팀원이 되어갔다. 내면은 점점 약해져 갔다. 하루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직장생활에 의미가 사라지니 매일이 껍데기 같았다. 이때까지도 나의 직업관에는 의심이 없었지만, 동시에 주변 친구들의 직업을 대하는 태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남들처럼 월급의 수단으로만 여겼어야 했다’

‘다들 퇴근 후 치맥, 정시 퇴근 후 공방을 다니는 취미생활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건가’


사회에 첫 발을 들일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일’의 관계에 집중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고민하고 희미하나마 자신만의 파랑새를 느낀다. 하지만 나로부터 혹은 주변에서의 조급한 시선은 그 파랑새를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서둘러 선택한 일이 관심분야와 맞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사 그런 줄 알고 선택했어도 조직과 시스템에 근접해지다 보면 일에 대한 열정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일을 쉽게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렵다. 경제적 문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나만을 위한 경제활동이 아닌 것이다. 기혼이면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미혼이어도 부모님이나 조카에게 들이는 돈 같이 그 나이에서 해야 할 경제적 역할이 생겨 버렸다. 그 사이 자신 안의 파랑새는 점차 희미해진다.

앞서 여러 번 얘기한 11번의 퇴사는 일종의 파랑새는 찾는 과정이었다. 돈에 아주 자유로운 건 아니었지만 부양할 가족이 없는 나는 부모님께 조금씩 드리는 용돈 외에는 내 생계만 책임지면 되었다. 이렇게 확보된 인생의 여백을 한껏 활용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직업에 대해 불안정한 마음이다. 이 주제를 쓰는 지금도 어떤 다른 주제보다 공을 들이고 있지만 내 안에 무언가가 걸려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제야 인정하게 된다.

나의 파랑새는 분명하지 못했다. '순수하고 공정한 세계를 만드는 것'은 직업관이라기보다 인생관에 가깝고 적성보다는 성격이 반영된 거였다. 그만큼 직업으로 구현하기에 구체성과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내적 이데아를 정교화 과정 없이 바로 직업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공정함'이 작용하는 마케팅 리서치라는 분야를 찾았고 잦은 퇴사를 했지만 이 업계의 경력을 쌓은 것이었다. 게다가 기업과 소비자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나의 파랑새에 근접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조직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개인의 이상 실현이 아니었다. 설사 이상 실현을 하겠다는 마음에 열정적으로 그게 반드시 좋은 평가로 연결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직업은 '나 – 일 – 조직' 간 3각 관계이고 연차가 높아질수록 '나-조직' 관계는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 조직은 나의 파랑새에 관심이 없다. 내가 파랑새 찾기에 몰두하는 동안 시간이 흐른 것이다. 게다가 마흔이 넘으면서 경제적 활동과 사회적 성취를 이룰 기회는 줄어든다. 자신 만만했던 ‘일에 대한 열정’은 조직이 바라는 능력과 연결되지 않음이 명확해진다. 성실히 자신의 입지를 쌓아왔다 해도 상황은 비슷하다. 사회에서 더 이상 그만큼의 열정을 요구하지 않고, 혹은 젊은 시절 쌓아온 내 능력이 사회의 요구와 맞지 않다는 것을 점점 더 느낀다.

내 전부였던 이놈의 일을 어찌해야 할지 갈등이 인다.

'간신히 찾은 파랑새를 날려 보내야 할까. 월급만 벌어준다고 생각하고 그냥 다닐까?'

자리의 위태함과 경제적 부담까지 더해져 이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직업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생계 수단이고, 누군가에게는 꿈의 실현이기도 하다. 처한 환경과 능력에 연결되어 있는 만큼 직업에 대한 의미는 사람 수만큼 다양해질 수 있다. 나는 예전부터 직업을 얻는 것을 결혼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나의 모든 면을 보이고, 보고 싶지 않은 상대의 면까지 인정해가며 서로의 삶을 하나의 길로 합치하는 결혼생활 말이다. 직업 역시 그러한 것 같다. 내 삶에 연결되어 있고 나는 직업으로 규정되고 내가 그 직업을 완성해 간다. 그래서 직장에 자유로울 수 있을지언정 직업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10년 넘게 알고 지내온 사회에서 만난 동생이 있다. 대학에서 광고홍보학을 전공하고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친구이다. 애초에 본인의 사업을 하는 게 목표였는데, 아이디어도 풍부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해 충분히 그럴 만한 자질은 있어 보였다. 그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여행 사업을 시작했고 이러저러 상품은 바꿨지만 사업성 있는 아이템을 잡아 꽤 잘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시작되고 말았다.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는 그 친구는 갑자기 공백의 상태가 되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던 그는 평소 사업 아이디어를 적는 노트에서 초창기 적은 아이템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아이템을 보니까 내가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때가 생각나더라고요.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사업이었는데 좀 애매했거든요. 지금 하던 사업은 수익성도 좋고 일이 끊기지 않았지만 뭔가 보람은 느끼지 못했어요. 기왕 이렇게 멈춰가는 거 한번 해볼까 해”


동생이 말한 아이템은 대충 들어도 돈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말하는 얼굴에는 꽃 같은 화사함이 있었다. 눈은 웃고 있고, 입은 실룩거리며 술술 계획을 뱉어 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화사함이 있다. 나의 형부도 그중 하나이다. 건설 관련 일을 하는 형부는 고되고 힘든 일이지만 일주일씩 가는 출장이 잡힐 때마다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설레는 표정이 가득 찬다. 40년 가까이 중고 가전상을 운영한 아버지는 못 배워서 시작하셨다지만 팔순이 넘은 나이에 삐걱거리는 선풍기를 고치고는 스스로 뿌듯해한다. 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생계로 선택한 일에서 보람을 찾든 우리는 어떻게든 자신만의 파랑새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는 사람만이 화사한 생기를 유지한다.

동생은 일 년이 가까이 고군분투하며 본인이 생각한 플랫폼을 구축했다. 방문자는 늘었지만 여전히 수익은 없는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과정이지만 하면 할수록 이 플랫폼이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희미했던 자신만의 파랑새를 세상 밖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나의 파랑새는 너무 미숙했다는 것을, 그리고 사회는 나의 자아실현을 용인해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직업에 생각은 더 확실해졌다. 일에 대한 성취감, 나의 기질적 요소 즉, 내가 만든 파랑새적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즉, '직업으로서의 일'과 ‘나의 세계'간의 교집합이 말이다. 그래야 내 자신에게도, 시스템에 대해서도 당당할 수 있다.

소설 ‘멍키스패너’를 다시 꺼내 보면 가진 것은 방랑벽과 수리기술 밖에 없는 주인공이 어떻게 사회에 연결되는가에 초점을 둔다. 회사나 직급의 타이틀 없이 계약직으로 떠도는 그가 당당할 수 있는 건 – 금전적으로나 내적 감정으로나 – 어떤 난감한 현장도 자신만의 연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그 자부심은 계약직이라는 불안을 상쇄한다. 그리고 본인이 선택한 방랑의 인생을 살아간다. 내가 그 노동을 선택했다면 노동은 나를 자유롭게 해 준다. 적어도 노동을 선택할 만큼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깊고 실행을 위해 노력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노동은 그렇지 못한 것보다 생명력이 길다.

현실의 삶이 녹록지 않지만 그 굴레를 잠시 세우고 이 굴레가 내 것이 맞는지 돌아봤으면 한다. 나부터 이 굴레가 사회에 용인되는 모양일지 돌아보고자 한다. 나의 파랑새를 꺼내 자유로운 멍키스패너로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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