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의 이야기(6) - 엑싯(그 이후)
"행복한 순간을, 혹은 경험하고 싶은 행복할 것 같은 순간을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로 떠올려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때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나라인 스페인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이국적인 마을의 아침이었다. 뜬금 없었지만, 행복을 위해 산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사는 내가 이런 꽤 구체적인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에 한편 놀라며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잠시의 생각 후에, 내가 떠올린 순간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밤새 하고 나서, 아침에,
그런 외국의 냄새가 물씬 나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사이에 앉아 산미가 나는 거대한 커피와 샐러드를 시켜고 나서 홀짝 홀짝대면서,
와, 엄청난 밤이었다, 우리 이거 먹고 한 네다섯시간 이따가 다시 모여서 아까 그거 같이 디벨롭해보자, 잠은 언제 자? 몰라, 허허허허 웃고, 정신도 없는 와중에 앞에 있는 사람들을 놀리는 나의 모습이었다.
이게 행복한 순간이라고?
남들이 듣기에는 정말 기괴한 이 행복의 순간을 내가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이 대답을 마주하기 싫어 끝까지 피해왔었지만, 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직감했었으리라. 외국, 커피와 같은 꽤 보편적인 키워드도 있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새' 같이 일할 수 있는,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어떤 일', 그리고 밤을 새고서고 허허허허 웃음이 나올 수 있는 '훌륭한 동료들과의 케미'. 보통의 직장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이상한 행복의 조건이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나의 일을 일구겠구나 직감하고 말았다.
그래서 참 좋은 아침이었고 좋은 사람과 함께였지만 다가올 것들이 두려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아침으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의 직장인, 당시는 20명 밖에 되지 않았던 스타트업으로 옮겨야겠다는 결심에 어렵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예상 밖으로 잔인한 질문이 되었었더랬다.
그 뒤로 사람들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에 대해 물을 때, 이 행복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많이 인용하곤 한다.
남들이 생각했을 때 평범하지 않은 행복의 이미지라고 해도, 이게 정말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고, 이게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구태여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2019년, 베이징 출장을 갔다가 내가 상상하던 구체적인 이미지의 순간을 맞딱뜨려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어 어머 이건 찍어야 해!하고 찍어 놓았다.
전투가 벌어진 현장의 노트북들과,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스크립트와 새벽에 배달이 온 스타벅스 커피들.
죽을 것 같이 힘들면서도 ‘위대한 사람들’과 ‘위대한 일’을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만큼 나를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은 잘 없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이런 광경들이 자주 목격되어, 그때마다 잊지 않고 사진들을 찍어 놓는다. 이틀내내 아이디어 내고, 토론하고, 소리 지르고, 화이트보드에 적고, 정신 나가서 농담하고, 밥 먹고 또 다시 돌아와서 또 토론하고. 어느 날은 오후 12시부터 10시까지, 밥도 도시락 시켜 먹으면서 주구장창 끝장 토론을 하는 때도 있다.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힘들었지만, 뿌듯한 과정이다.
이것 때문에 나는 내가 오너십을 가지고 결정을 할 수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만들 수 있으며, 작은 의사결정에도 함께 참여하여 성을 만들어 나가는 스타트업이라는 여정을 선택했고, 만족하면서 이 세계에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어렸을 때 세계정복을 꿈꾸던 아이처럼.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뿜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서비스가 전세계 사람들에게 나아가 닿았으면 한다. 좋은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