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차
중학교 2~3학년 무렵,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차갑고도 회색빛을 띠는 문장들, 그 속에서 짙은 염세적 기운이 흘러나왔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 안에 숨어 있던 예술적 감성을 흔들어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책은 내 삶에서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고, 단순한 독서를 넘어 스스로 끄적이며 마음을 표현하려는 작은 습관도 싹트기 시작했다.
전혜린의 글은 우울한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언어로 풀어내는 감각이 유난히 섬세하고 깊다. 그 감성적이고 뛰어난 필치는 나의 내면에도 조금씩 스며들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래서일까. 성인이 된 뒤에도 마음이 가장 무거워질 때면 다시 그녀의 책을 집어 들곤 했다. 깊은 우울 속에서 끝까지 읽고 나면 신기하게도 어둠의 끝에서 빛을 찾듯, 오히려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 청소년기를 흔들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펼쳐보게 되는 이 책은, 내게 문학이 가진 치유와 위안의 힘을 인지하게 해 준 인생 책이다.
당신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책 한 권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