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병원이 관심있는 UX 주제는 사용성도, 수익성도 아니다.
병원을 둘러보면 온통 UX디자이너에게 눈에 밟히는것들 투성이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정보의 우선순위도 알기 어려운 사이니지, 입원환자들이 이동할때마다 끌고다니지만 발에 걸리고, 휠체어와 침대에 옮겨다닐때 불편해보이는 환자링거 폴대, 항상 손으로 누르고 잡아야 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이나 문의 손잡이, 하다못해 피가 묻었을것 같은 찝찝한 쓰레기통까지.. 온통 앞으로 내가 할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병원 이직 초반에는 의지를 불태우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즐거운 고민을 하며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은 내가 관심있어하는 이런 일들에는 별 흥미를 못느껴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초반에는 바텀업으로 사이니지를 바꿔야 한다, 병원 로비 경험을 바꿔야 한다, 키오스크 사용성을 바꿔야한다고 얘기하며, 이런저런 과제들을 통해 사용자 경험이 어떻게 변화해서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의료진과 병원경영에 어떤 도움이되는지 아무리 얘기해도 역부족이었다. 대부분 ‘중요한건 알겠는데, 나중에 하자’는 시큰둥한 반응들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중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병원은 이렇게 환자이용환경의 사용성에 투자해봐야 의료수가로 보상받을 수 있는것도 아니고, 환자경험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병원 브랜딩에 미치는 영향이 큰것도 아니기때문에, 즉 실질적으로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 비용을 병원 수익에 직결되는 의료질을 높이기 위해 의료장비를 구매하거나, 의료진을 추가로 영입하거나, 의료업무 환경을 개선하는데 활용하는데 투자하는것이 병원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기 때문여, 초반에 기획했던 UX 과제들은 대부분 나중에, 나중에… 라고 하면서 과제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와 반대로 별다른 설득 없이도 오히려 경영진 또는 의료진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참여하는 과제들이 있었다. 예를들면 수술중에 필요한 정보들을 한곳에 통합해서 보여주는 통합대시보드를 개발한다거나, 의료진들이 잊지않고 손소독을 할 수 있도록 알람해주는 시스템을 도입 검토한다거나, 환자의 낙상/욕창 발생사고를 줄이기 위한 솔루션을 개발하기 위한 과제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과제들은 위에서 언급했던것처럼 본인이 바텀업으로 기획하고 발재해서 경영진을 설득해서 추진한 사례들이 아니다. 대부분 의사,간호사들이 임상현장에서 느꼈왔던 어려움들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UX의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된 과제들이다. 실제로 선별되고 추진된 과제들은 투입 리소스를 고려했을때 무한정 늘릴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선별되기 위해 제안된 의료진들의 과제의뢰 사례들은 감당이 안될정도로 많은 사례들이 접수되었다. 이를통해 중요하게 깨달은점이 하나 있었다. ‘현재 병원UX의 실질적인 수요층은 임상현장의 의사,간호사구나…’ 라는것을 말이다.
실제로 병원UX를 누가 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UX과제를 의뢰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수요자의 페르소나를 구분해보면 크게 3가지로 나뉜다.
PI(Process Innovation) 과제
간호사는 현장업무개선을 위해 의무적으로 추진해야하는 Process Innovation과제가 있다. 그중에서 임상현장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기에는 규모가 크거나, 해결방법을 모르는 경우 UX컨설팅을 의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종류의 과제는 부서차원에서 추진하는 과제이기 때문에 해당부서의 리소스 투입을 바탕으로 정식 과제로 진행된다.
솔루션/아이디어 디자인 및 개발 과제
의사,간호사 본인이 문제 해결방법을 찾았지만, 이를 실제로 구현하려니 방법과 여력이 안되어 디자인 또는 개발추진을 의뢰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개인적인 연구 성격의 과제이기 때문에, 이중에서 선별해서 병원차원의 지원을 받고 과제화 되어 추진되는 경우이다.
의료지원 부서 과제
보통 진료지원실이나 간호행정실 같은 조직은 의사,간호사의 의료업무를 지원하는 조직이다. 이런 조직은 임상현장에서 자체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요청받거나 자체적으로 빌굴해서 추진한다. 이런 과제들중 IT관련 과제나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들에대해 컨설팅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종류의 과제는 병원 전사적인 과제로 확대 추진하기 좋은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직접 과제 발의를 해보기도 하고, 병원과 의료진들이 요청한 과제들을 추진하고 경험하면 그 과정에서 병원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곳에 투자 우선순위가 있는지에 대해 조금씩 감이 잡힌다. 이렇게 어느정도 감을잡고 신규과제들을 기획하고 발재를 했는데, 이전과 다르게 병원에서 매우 높은 관심을 가지고 과제를 추진하게된 경험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스마트병원’ 과제이다. 2019년즈음 그 당시 기업경영에서 다루던 가장 큰화두는 디지털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었다.
그당시 하버드비지니스리뷰 같은 경영잡지에서도 꾸준하게 다뤘던 케이스스터디는 항상 누가 성공적으로 디지털전환을 이뤄내는지 여부에 기업의 생존이 달려있다고 한참을 얘기하던 때였다. 그때 마침 개인적으로 경영대학원을 다니면서 업무를 하던 상황이었는데, 디지털전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병원에 적용하면, 지금까지 병원의 많은 노력에도 풀지못했던 환자안전이나 의료효율, 환자경험, 서비스방식등 수많은 문제들의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3차병원의 디지털전환 방향성을 제안하는 ‘스마트병원’ 전략 과제를 기획하고 제안했는데, 의외로 병원이 이전과는 다르게 매우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놀란적이 있다. 그 이후로 ‘스마트병원’ 과제는 병원 전사과제가 되어서 외부 IT전문 기업들과 MOU를 맺고, 전략 과제들을 도출해서, 병원 전사적으로 워킹그룹을 만들고 솔루션 개발 및 실제로 병원현장에 적용된 사례를 만들었다. 어찌보면 그 병원에서 UX에서 자체적으로 발의한 과제가 실제로 병원 전사적으로 적용된 첫 성공사례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병원UX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다. 환자안전, 의료진 부족, 낮은 의료업무 효율처럼 병원이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으나 풀기 어려웠던 문제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리고 그 가치를 UX가 제공할 수 있다면, 병원UX에 대한 수요는 얼마든지 새롭게 창출될 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고, 그 수요는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켓)수요를 개발해야 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해보자. 만약 누군가가 병원에 UX에 대한 수요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동안 본인의 경험상 3가지는 분명히 말 할 수 있을것 같다.
병원 UX 수요는 존재한다.
현재 병원 UX의 수요는 환자보다는 의료진에게 몰려있다.
잠재적인 병원 UX 수요는 매우 많다. 하지만 미개척 분야이다. UX 수요를 발굴하거나 개발해야한다.